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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브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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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유브 술탄국은 1169년 살라흐 앗 딘이 건국한 이슬람 왕조로, 살라흐 앗 딘의 아버지 나짐 앗딘 아이유브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살라흐 앗 딘은 십자군과의 전쟁에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이슬람 세계의 강자로 부상했으나, 그의 사후 왕조는 분열되어 세력이 약화되었다. 알 아딜과 알 카밀 시기에는 십자군에게 예루살렘을 잠시 빼앗기기도 했으며, 맘루크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아이유브 왕조는 셀주크 제도의 이크타 제도를 발전시켜 군사, 정치 체제를 운영했으며, 맘루크, 쿠르드족 등을 주요 세력으로 활용했다. 농업, 상업, 교육,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을 이루었으며, 특히 수니파 이슬람 교육과 건축, 십자군과의 전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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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브 술탄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통칭아이유브朝
정식 명칭아이유브 이집트 술탄국
지위주권 국가 (1171년–1260년)
정치 체제술탄국 (아바스 칼리파의 제후국)
성립 연도1171년
성립 계기살라흐 앗 딘에 의해 건국
멸망 연도1260년/1341년
수도카이로 (1171년–1174년, 1218년–1250년)
다마스쿠스 (1174년–1218년)
알레포 (1250년–1260년)
하마 (1341년까지)
공용어아랍어 (대다수 인구, 시)
쿠르드어 (왕조, 지배 계층, 군대, 귀족)
페르시아어 (일부 술탄)
튀르키예어
종교수니 이슬람
학파: 샤피이파
신조: 아샤리파
통화디나르, 디르함
지도
1193년 아이유브 술탄국
살라흐 앗 딘 사망 당시 아이유브 이집트 술탄국 (분홍색)
국가
건국 이전파티마 칼리파국
장기 왕조
예루살렘 왕국
주라이드朝
조지아 왕국
샤흐 아르메니아
아르투크朝
건국 이후맘루크 술탄국
라스울朝
하산케이프 토후국
돈볼리 공국
시르반 토후국
킬리스 토후국
빙괼 토후국
통치자
칭호술탄
초대 술탄살라흐 앗 딘
재위 기간1174년–1193년
알-아지즈 우트만1193년–1198년
알-만수르 나시르 앗 딘 무함마드1198년–1200년
알-아딜 1세1200년–1218년
알-카밀1218년–1238년
알-아딜 2세1238년–1240년
아스-살리흐 아이유브1240년–1249년
샤자르 앗 두르1250년–1250년
알-아슈라프 무사1250년–1254년
통계
면적 (1190년 추정)2,000,000 km²
면적 (1200년 추정)1,700,000 km²
인구 (12세기 추정)7,200,000명

2. 역사

1169년 살라흐 앗 딘(살라딘)이 삼촌 시르쿠와 함께 장기 왕조를 위해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아이유브 왕조가 시작되었다. 아이유브라는 이름은 살라딘의 아버지이자 시르쿠의 형제인 나짐 앗딘 아이유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20]

살라딘의 독수리에 대한 19세기 후반 스케치. 이집트 카이로 시타델 벽에 그려져 있으며, 역사적으로 머리가 두 개 달린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현재는 사라졌다. 역사적 자료에서는 이를 확인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살라딘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시르쿠가 죽은 후, 살라딘은 빠르게 이집트를 장악하고 1169년 다미에타를 침공한 십자군을 격퇴했다. 1171년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알아디드가 사망하자 파티마 왕조를 폐위시켰다. 1174년 자신의 주군 누르 앗 딘이 죽은 후에는 시리아다마스쿠스를 복속하여 이슬람의 최대 강자가 되었다. 살라딘은 십자군과의 전쟁을 계속하여 예루살렘을 다시 이슬람 영토로 회복하였고, 이에 반발하여 침공한 제3차 십자군에 맞서 싸웠다. 살라딘의 치세에 아이유브 왕조는 이슬람을 하나의 기치 아래 통일하고 오랜 분열을 끝냈다.

1193년 살라딘이 죽자 아이유브 왕조는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각각 상속되었는데, 이후 분열되고 그 힘이 점차 약해졌다. 살라딘 사후에 친척과 가신들에게 영토가 분배되면서 통일 왕조는 유지되지 못하고 각자의 영지에서 자치적 성격의 분권화가 진행되었고, 봉건적인 가문 연합체로 왕조의 성격이 바뀌었다.

살라딘의 형제인 알아딜과 그의 아들 알카밀 시대에는 아이유브 왕조의 힘이 약해져 잠시 예루살렘을 십자군에게 내주기도 하였다. 알카밀의 아들 살리흐가 죽은 이후 아이유브 왕조는 완전히 힘을 잃고 노예 출신의 맘루크 왕조로 대체된다.

2. 1. 기원

아이유브 왕조는 1169년 살라흐 앗 딘(살라딘)이 삼촌 시르쿠와 함께 장기 왕조를 위해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시작되었다. 아이유브라는 이름은 살라딘의 아버지이자 시르쿠의 형제인 나짐 앗딘 아이유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20]

시르쿠가 죽은 후, 살라딘은 빠르게 이집트를 장악하고 1169년 다미에타를 침공한 십자군을 격퇴했다. 1171년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알아디드가 사망하자 파티마 왕조를 폐위시켰다. 1174년 자신의 주군 누르 앗 딘이 죽은 후에는 시리아다마스쿠스를 복속하여 이슬람의 최대 강자가 되었다. 살라딘은 십자군과의 전쟁을 계속하여 예루살렘을 다시 이슬람 영토로 회복하였고, 이에 반발하여 침공한 제3차 십자군에 맞서 싸웠다. 살라딘의 치세에 아이유브 왕조는 이슬람을 하나의 기치 아래 통일하고 오랜 분열을 끝냈다.

1193년 살라딘이 죽자 아이유브 왕조는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각각 상속되었는데, 이후 분열되고 그 힘이 점차 약해졌다. 살라딘 사후에 친척과 가신들에게 영토가 분배되면서 통일 왕조는 유지되지 못하고 각자의 영지에서 자치적 성격의 분권화가 진행되었고, 봉건적인 가문 연합체로 왕조의 성격이 바뀌었다.

살라딘의 형제인 알아딜과 그의 아들 알카밀 시대에는 아이유브 왕조의 힘이 약해져 잠시 예루살렘을 십자군에게 내주기도 하였다. 알카밀의 아들 살리흐가 죽은 이후 아이유브 왕조는 완전히 힘을 잃고 노예 출신의 맘루크 왕조로 대체된다.

이븐 일야스, 알-카즈라지, 알-마크리시, 이븐 타그리베르디, 이븐 할둔과 같은 중세 아랍 역사가들은 아이유브 왕조를 '쿠르드족의 국가', '쿠르드 정권', '쿠르드족 왕/왕국' 등으로 지칭했다.[22]

2. 1. 1. 셀주크 제국, 장기 왕조 시대

아이유브 왕조의 시조인 나짐 앗딘 아이유브 이븐 샤디는 쿠르드족 라와디야 부족 출신이었다.[20] 아이유브의 조상들은 북부 아르메니아의 드빈에 정착했다.[7] 12세기 전반, 아르메니아에 거주하던 쿠르드족의 샤지는 나짐 앗딘 아이유브와 쉬르쿠를 데리고 이라크로 이주하여, 셀주크 제국 아래에서 바그다드의 군사 장관을 맡은 비흐루즈를 섬겼다.[165] 샤지는 티크리트의 성주로 임명되었고, 그의 사후 아이유브가 티크리트의 성주 지위를 계승했다.[165]

튀르크족이 도시를 점령하면서 드빈의 상황이 악화되었다. 샤디는 두 아들 아이유브와 아사드 앗딘 시르쿠와 함께 드빈을 떠났다.[7] 그의 친구이자 셀주크 왕조 치하 북 메소포타미아의 군사 총독이었던 무자히드 앗딘 비루즈는 그를 환영하여 티크리트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샤디가 사망한 후 아이유브는 그의 형제 시르쿠의 도움을 받아 도시의 통치를 이어받았다. 그들은 함께 도시를 잘 관리하여 지역 주민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21]

1131년에 셀주크 제국의 술탄인 마흐무드 2세가 사망한 후 왕위를 둘러싼 내전이 일어났고, 이 전쟁 속에서 아이유브는 패주하는 모술의 영주인 이마두딘 장기에게 도움을 주었다.[166] 1137년/1138년에 아이유브는 비흐루즈의 명령으로 티크리트에서 쫓겨났지만, 성을 잃은 날 밤에 아이유브의 아내는 사내아이를 낳았고, 태어난 아이는 유수프(후의 살라딘)라고 이름 지어졌다.[167] 티크리트를 잃은 아이유브는 동생 쉬르쿠와 함께 모술의 장기의 곁으로 도망쳐 장기에게 받아들여졌다.

이마드 앗딘 장기모술의 통치자로, 칼리프 알-무스타르시드 치하의 아바스에 의해 비루즈에게 패배했다. 티크리트를 거쳐 모술로 도망치기 위해 장기는 아이유브에게 몸을 의탁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아이유브는 이에 응하여 장기와 그의 일행에게 티그리스 강을 건너 모술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배를 제공했다.[22]

장기를 도운 결과, 아바스 당국은 아이유브에게 징벌 조치를 취하려 했다. 동시에, 별도의 사건에서 시르쿠는 비루즈의 측근이 티크리트에서 한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그를 살해했다. 아바스 법정은 아이유브와 시르쿠 모두에게 체포 영장을 발부했지만, 형제가 체포되기 전에 1138년 티크리트를 떠나 모술로 향했다.[22] 모술에 도착하자 장기는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했고 두 형제를 자신의 휘하로 들였다. 아이유브는 바알베크의 사령관이 되었고 시르쿠는 장기의 아들 누르 앗딘의 휘하에 들어갔다. 역사가 압둘 알리에 따르면, 아이유브 가문은 장기의 보살핌과 후원 아래 두각을 나타냈다.[22] 아이유브는 쉬르쿠와 함께 장기 휘하의 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139년에는 바알베크의 지사로 임명되었다.

1146년에 장기가 사망한 후 바알베크는 셀주크 제국의 다마스쿠스 총독의 공격을 받아, 아이유브는 현금과 영지를 대가로 항복했다. 1152년에 14세가 된 살라딘은 아이유브의 곁을 떠나 장기의 아들이자 알레포를 지배하는 누르 앗딘 마흐무드를 섬겼다.[168] 살라딘은 누르 앗딘으로부터 이크타 (봉토)를 받았고, 그를 가까이에서 보좌했다.[169] 누르 앗딘이 다마스쿠스로의 진출을 시도했을 때, 다마스쿠스에 거주하던 아이유브는 누르 앗딘을 섬기고 있던 쉬르쿠와 연락을 취했고, 1154년에 누르 앗딘은 다마스쿠스의 무혈 개성에 성공했다.[170] 다마스쿠스 개성 후, 아이유브는 누르 앗딘에게 협력한 것을 평가받아 이크타와 다마스쿠스의 지배권을 받았고, 계속해서 다마스쿠스에 머물렀다.[171]

2. 2. 이집트에서의 발전

1169년 살라흐 앗 딘(살라딘)이 이집트를 장악한 후, 시아파 파티마 왕조를 폐지하고 수니파 아바스 왕조의 종주권을 선포했다. 살라딘은 이집트 내 수니파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펼쳤다.



살라딘은 카이로에서 파티마 군대의 5만 명 규모의 누비아 연대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가족 구성원에게 국가의 고위직을 부여했다.[35] 또한, 시아파가 지배하던 카이로에 말리키 법학 학파와 자신이 속한 샤피이 학파의 학교를 알-푸스타트에 건설하여 수니파 무슬림의 영향력을 확대했다.[35]

1171년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알아디드가 사망하자, 살라딘은 이 권력 공백을 이용하여 이집트의 충성을 바그다드에 기반을 둔 수니파 아바스 왕조로 전환했다.[26] 그는 이집트 각지의 카디(판사)를 수니파 인물로 교체하고, 시아파의 교육 기관을 폐쇄하는 등 수니파 부흥 정책을 추진했다.

2. 2. 1. 살라딘의 집권

1169년 삼촌 시르쿠와 함께 장기 왕조를 위해 이집트를 정복한 살라흐 앗 딘이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다. 아이유브라는 이름은 시르쿠의 형제이자 살라흐 앗 딘의 아버지인 나짐 앗딘 아이유브의 이름에서 기원한다.

시르쿠가 사망한 후, 살라흐 앗 딘은 재빨리 이집트를 장악하고 1169년 다미에타를 침공한 십자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1171년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알아디드가 죽자 파티마 왕조를 폐위시켰다. 1174년 장기 왕조의 누르 앗 딘이 죽은 후에는 시리아다마스쿠스를 복속하여 이슬람의 최대 강자가 되었다. 살라흐 앗 딘은 십자군과의 전쟁을 계속하여 예루살렘을 다시 이슬람의 영토로 회복하였고, 이에 반발하여 침공한 제3차 십자군에 맞서 싸웠다. 살라흐 앗 딘의 치세에 아이유브 왕조는 이슬람을 하나의 기치 아래 통일하고 오랜 분열을 끝냈다.

1193년 살라흐 앗딘이 죽자 아이유브 왕조는 살라흐 앗 딘의 후계자들에 의해 각각 상속되었는데, 이후 분열되고 그 힘이 점차 약해졌다. 살라흐 앗 딘의 사후에 친척과 가신들에게 영토가 분배되자, 통일 왕조로 유지되지 못하고 각자의 영지에서 자치적 성격의 분권화가 진행되었고 봉건적인 가문연합체로 왕조의 성격이 바뀌었다.



1164년, 누르 알 딘은 혼란스러운 이집트에서 십자군이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르쿠를 원정군 지휘관으로 파견했다. 시르쿠는 아유브의 아들 살라딘을 휘하 장교로 임명했다.[26] 그들은 이집트의 이집트 재상인 디르함을 성공적으로 몰아내고 그의 전임자인 샤와르를 복위시켰다. 복위된 후, 샤와르는 시르쿠에게 이집트에서 군대를 철수하라고 명령했지만, 시르쿠는 누르 알 딘의 뜻에 따라 남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거부했다.[27] 수년에 걸쳐 시르쿠와 살라딘은 십자군과 샤와르 군대의 연합군을 먼저 빌바이스에서, 다음은 기자 근처,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 격파했다. 살라딘은 시르쿠가 하 이집트에서 십자군을 추격하는 동안 그곳에 머물며 방어했다.[28]

샤와르는 1169년에 사망했고 시르쿠가 재상이 되었지만 그 해 말에 사망했다.[29] 시르쿠가 사망한 후, 살라딘은 파티마 칼리프 알-아디드에 의해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중세 무슬림 연대기 작가 이븐 알-아사르에 따르면, 살라딘 외에는 "더 약하거나 젊은" 사람이 없었고, "그를 따르거나 섬기는 에미르도 없었기" 때문이다.[30] 살라딘은 곧 경력상 그 어느 때보다 독립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이는 이집트의 상황에 영향을 미치려 했던 누르 알 딘을 실망시켰다. 그는 살라딘의 형 투란-샤를 살라딘의 감독관으로 임명하여 아이유브 가문 내에 불화를 일으키고 이집트에서의 입지를 약화시키려 했다. 누르 알 딘은 살라딘의 요청에 따라 그의 아버지 아유브를 합류시켰다. 그러나 아유브는 주로 살라딘이 파티마의 재상으로서의 지위 때문에 꺼렸던, 이집트에서 아바스 왕조의 종주권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비록 누르 알 딘은 아이유브 가문을 경쟁으로 몰아넣는 데 실패했지만, 아이유브 가문의 다른 가족들, 특히 시리아의 여러 지방 총독들은 살라딘을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31]

살라딘은 카이로에서 파티마 군대의 5만 명 규모의 누비아 연대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도록 투란-샤에게 명령한 후 이집트에서 통제를 강화했다. 이 성공 이후, 살라딘은 가족 구성원에게 국가의 고위직을 부여하기 시작했으며, 시아파 무슬림이 지배하던 카이로에서 말리키 법학 학파의 칼리지와, 그가 속한 샤피이 학파의 칼리지를 알-푸스타트에 건설하도록 명령함으로써 수니파 무슬림의 영향력을 확대했다.[35] 1171년에 알-아디드가 사망했고, 살라딘은 이 권력 공백을 이용하여 사실상 국가를 장악했다. 권력을 잡은 후, 그는 이집트의 충성을 바그다드에 기반을 둔 수니파 이슬람을 따르는 아바스 칼리파조로 전환했다.[26]

2. 2. 2. 파티마 왕조 멸망과 수니파 부흥

1169년 삼촌 시르쿠와 함께 장기 왕조를 위해 이집트를 정복한 살라흐 앗 딘(살라딘)이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다. 아이유브라는 이름은 시르쿠의 형제이자 살라딘의 아버지인 나짐 앗딘 아이유브의 이름에서 기원한다.

삼촌 시르쿠가 죽은 후, 살라딘은 재빨리 이집트를 장악하고 1169년 다미에타를 침공한 십자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1171년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알아디드가 죽자 파티마 왕조를 폐위시켰다.[26] 권력을 잡은 후, 살라딘은 이집트의 충성을 바그다드에 기반을 둔 수니파 이슬람을 따르는 아바스 칼리파조로 전환했다.[26]

1163년, 이집트를 지배하는 시아파 국가 파티마 왕조의 재상 샤와르는 정적인 디르감과의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장기 왕조에 원조를 요청했다.[172][173] 1164년 4월 누르 앗딘은 시르쿠프를 사령관으로 하는 원정군을 파견했고, 원정군의 막료로 살라딘이 임명되었다. 시르쿠프는 빌베이스에서 디르감에게 승리하고 샤와르를 재상으로 복직시켰다. 그러나 시르쿠프를 두려워한 샤와르는 그에게 이집트에서 철수를 요구했고, 십자군 국가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 1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174][175] 8월부터 시르쿠프가 농성하는 빌베이스는 예루살렘 군과 이집트 군의 포위를 받았고, 11월에 화의가 성립되어 시르쿠프와 아모리 1세는 이집트에서 철수했다.[174] 1167년에 시르쿠프와 살라딘은 다시 이집트 원정을 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같은 해 8월에 강화 조약을 맺고 철병한다.

1167년의 강화 조약 때 샤와르는 예루살렘 왕국에 공납을 대가로 원조 약속을 받아냈지만,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알-아디드와 민중은 샤와르의 방침에 불만을 품었고, 샤와르를 제거하려는 계획이 세워졌다.[176][177] 이집트는 십자군의 공격을 받아 푸스타트가 십자군에 의해 제압될 것을 두려워한 샤와르는 푸스타트에 불을 질렀고, 푸스타트는 잿더미가 되었다.[178][179] 샤와르와 적대하는 파벌의 인물은 누르 앗딘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1168년 12월에 시르쿠프와 살라딘은 알레포를 출발하여 세 번째 이집트 원정을 시작했고, 시르쿠프의 진군을 알게 된 아모리 1세는 팔레스타인으로 철수했다.[180] 다음 해 1169년 1월에 시르쿠프 군은 카이로에 입성했고, 샤와르는 알-아디드의 명령에 따라 처형된다.[181][182] 시르쿠프는 샤와르를 대신하여 파티마 왕조의 와지르(재상)·군사령관에 취임했지만, 1169년 3월 시르쿠프는 급사하고, 살라딘이 재상직을 계승했다.[183][184][185] 재상에 취임한 후 살라딘은 "말리크 알 나시르(승리의 왕)" 칭호를 사용했다.[186]

살라딘은 이집트에 남은 병사 중에서 쿠르드인과 투르크계 맘루크를 선발하여 살라딘의 이름에 연유하여 살라히야라고 불리는 군단을 새로 편성했다.[190] 파티마 왕조를 섬기는 흑인 환관 무타민 알-필라하는 살라딘이 파티마 왕조의 군인에게서 몰수한 토지를 자신의 부하에게 수여하는 것을 우려하여, 십자군 세력과 결탁하여 반란을 꾀했지만, 음모를 감지한 살라딘은 사전에 무타민을 처형했다.[191] 1169년 8월, 무타민의 처분에 반발한 파티마 왕조의 잔주(흑인 노예병)는 카이로 시내에서 봉기했다. 살라딘은 잔주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들의 세력을 일소했다.[192] 살라딘은 이집트의 대 카디(대 판사)로부터 시아파 인물을 제외하고 수니파의 이븐 알-달바스를 발탁하고, 이집트 각지의 카디를 시아파에서 수니파 인물로 교체했다.[193]

1171년 9월 4일, 살라딘은 푸스타트의 모스크에서 열리는 금요 예배에서 후트바(설교)에서 알-아디드의 이름을 빼고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무스타디의 이름을 넣도록 명령하여, 이집트에서 수니파의 부활을 표명했다.[194] 9월 10일에는 카이로의 금요 예배에서도 동일한 후트바가 낭독되었고, 이집트 각지에서 수니파의 부활은 받아들여졌다.[194] 같은 해 9월 15일에 병상에 있던 알-아디드는 사망하고, 파티마 왕조는 멸망한다.[195] 살라딘의 통치하에서 파티마 왕조 시대에 부과되었던 막스(시장세, 순례자의 통행세 등)는 폐지되어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얻었다.[196] 이스마일파의 교육·연구 기관을 제거하기 위해,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알-하킴에 의해 건설된 도서관 (다르 알-일름)에 수장되어 있던 서적이 매각되었다.[197]

2. 3. 확장

1169년 삼촌 시르쿠와 함께 장기 왕조를 위해 이집트를 정복한 살라흐 앗 딘이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다. 아이유브라는 이름은 시르쿠의 형제이자 살라흐 앗 딘의 아버지인 나짐 앗딘 아이유브의 이름에서 기원한다.[23]

시르쿠가 죽은 후, 살라흐 앗 딘은 이집트를 장악하고 1169년 다미에타를 침공한 십자군을 몰아냈으며, 1171년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알아디드가 죽자 파티마 왕조를 폐지했다. 1174년 누르 앗 딘이 죽은 후에는 시리아다마스쿠스를 복속하여 이슬람의 최대 강자가 되었다.[26]

이후 살라딘은 시리아를 정복하기 시작하여, 1175년까지 하마홈스를 장악했지만 알레포는 점령하지 못했다.[48] 1182년 5월, 짧은 포위 공격 끝에 알레포를 점령하면서 모술은 아이유브 왕조의 유일한 주요 이슬람 경쟁자로 남았다.[60][61][62]

1230년 히라트가 잘랄 웃 딘에게 점령되자, 아슈라프는 룸 셀주크 왕조와 동맹을 맺고 에르진잔 근교 전투에서 승리했다. 1231년 알-무스탄시르의 요청으로 카밀은 메소포타미아 원정을 결의했다.[252] 1232년 10월 디야르바크르를 점령한 카밀은 아스-살리에게 주고, 히슨 카이파를 공략하여 원정을 마쳤다.[252]

2. 3. 1. 주변 지역 정복

1164년, 누르 알 딘은 혼란스러운 이집트에서 십자군이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르쿠를 원정군 지휘관으로 파견했다. 시르쿠는 살라딘을 휘하 장교로 임명했다.[26] 이들은 이집트의 이집트 재상인 디르함을 성공적으로 몰아내고 그의 전임자인 샤와르를 복위시켰다. 복위된 후, 샤와르는 시르쿠에게 이집트에서 군대를 철수하라고 명령했지만, 시르쿠는 누르 알 딘의 뜻에 따라 남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거부했다.[27] 수년에 걸쳐 시르쿠와 살라딘은 십자군과 샤와르 군대의 연합군을 먼저 빌바이스에서, 다음은 기자 근처,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 격파했다. 살라딘은 시르쿠가 하 이집트에서 십자군을 추격하는 동안 그곳에 머물며 방어했다.[28]

1163년, 이집트를 지배하는 시아파 국가 파티마 왕조의 재상 샤와르는 정적인 디르감과의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잔기 왕조에 원조를 요청했다.[172][173] 다음 해 1164년 4월 누르 앗딘은 시르쿠프를 사령관으로 하는 원정군을 파견했고, 원정군의 막료로 살라딘이 임명되었다. 시르쿠프는 빌베이스에서 디르감에게 승리하고 샤와르를 재상으로 복직시켰다. 그러나 시르쿠프를 두려워한 샤와르는 그에게 이집트에서 철수를 요구했고, 십자군 국가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 1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174][175]

샤와르는 1169년에 사망했고 시르쿠가 재상이 되었지만 그 해 말에 사망했다.[29] 시르쿠가 사망한 후, 살라딘은 파티마 칼리프 알-아디드에 의해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30] 살라딘은 곧 경력상 그 어느 때보다 독립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이는 이집트의 상황에 영향을 미치려 했던 누르 알 딘을 실망시켰다. 그는 살라딘의 형 투란-샤를 살라딘의 감독관으로 임명하여 아이유브 가문 내에 불화를 일으키고 이집트에서의 입지를 약화시키려 했다. 누르 알 딘은 살라딘의 요청에 따라 그의 아버지 아유브를 합류시켰다. 그러나 아유브는 주로 살라딘이 파티마의 재상으로서의 지위 때문에 꺼렸던, 이집트에서 아바스 왕조의 종주권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비록 누르 알 딘은 아이유브 가문을 경쟁으로 몰아넣는 데 실패했지만, 아이유브 가문의 다른 가족들, 특히 시리아의 여러 지방 총독들은 살라딘을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31]

1167년의 강화 조약 때 샤와르는 예루살렘 왕국에 공납을 대가로 원조 약속을 받아냈지만,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알-아디드와 민중은 샤와르의 방침에 불만을 품었고, 샤와르를 제거하려는 계획이 세워졌다.[176][177] 게다가 이집트는 십자군의 공격을 받아 푸스타트가 십자군에 의해 제압될 것을 두려워한 샤와르는 푸스타트에 불을 질렀고, 푸스타트는 잿더미가 되었다.[178][179] 샤와르와 적대하는 파벌의 인물은 누르 앗딘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1168년 12월에 시르쿠프와 살라딘은 알레포를 출발하여 세 번째 이집트 원정을 시작했고, 시르쿠프의 진군을 알게 된 아모리 1세는 팔레스타인으로 철수했다.[180] 다음 해 1169년 1월에 시르쿠프 군은 카이로에 입성했고, 샤와르는 알-아디드의 명령에 따라 처형된다.[181][182] 시르쿠프는 샤와르를 대신하여 파티마 왕조의 와지르 (재상)·군사령관에 취임했지만, 1169년 3월 시르쿠프는 급사하고, 살라딘이 재상직을 계승했다.[183][184][185]

살라딘은 카이로에서 파티마 군대의 5만 명 규모의 누비아 연대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도록 투란-샤에게 명령한 후 이집트에서 통제를 강화했다. 이 성공 이후, 살라딘은 가족 구성원에게 국가의 고위직을 부여하기 시작했으며, 시아파 무슬림이 지배하던 카이로에서 말리키 법학 학파의 칼리지와, 그가 속한 샤피이 학파의 칼리지를 알-푸스타트에 건설하도록 명령함으로써 수니파 무슬림의 영향력을 확대했다.[35] 1171년에 알-아디드가 사망했고, 살라딘은 이 권력 공백을 이용하여 사실상 국가를 장악했다. 권력을 잡은 후, 그는 이집트의 충성을 바그다드에 기반을 둔 수니파 이슬람을 따르는 아바스 칼리파조로 전환했다.[26]

살라딘은 1171~72년에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그 도시에서 많은 지지자들은 있었지만, 자금이 부족하다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의 아미르들은 그곳에서 가족 회의를 열었고, 살라딘의 조카인 알 무자파르 타키 알딘 우마르가 5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이집트 서쪽의 바르카(키레나이카) 해안 지역으로 원정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이 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여행객 강도질을 비난하고 자선세(''자카트'')를 납부하라는 편지를 베두인 부족에게 보냈다. 자선세는 그들의 가축으로부터 징수될 예정이었다.[36]

1172년 말, 아스완은 과거 파티마 왕조 군인들인 누비아인들에게 포위되었고, 도시의 지사였던 칸즈 알다울라는 살라딘에게 증원을 요청했고 그는 이에 응했다. 증원은 누비아인들이 이미 아스완을 떠난 후에 도착했지만, 투란 샤가 이끄는 아이유브군은 진격하여 이브림 마을을 점령한 후 북부 누비아를 정복했다. 투란 샤와 그의 쿠르드 병사들은 그곳에 잠시 주둔했다. 이브림에서 그들은 주변 지역을 습격했고, 마쿠리아 왕으로부터 휴전 제안을 받고 작전을 중단했다. 투란 샤의 초기 반응은 매파적이었지만, 그는 나중에 동골라에 사절을 보냈고, 사절은 돌아와 투란 샤에게 동골라와 누비아 전반의 빈곤을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아이유브 왕조는 누비아 남쪽으로의 추가 확장을 단념했지만, 아스완과 상 이집트의 보호를 보장하기 위해 누비아를 필요로 했다.[37] 이브림의 아이유브 수비대는 1175년에 이집트로 철수했다.[38]

1170년대 내내, 아이유브 왕조는 서쪽으로 계속 진출했다. 샤라프 알딘 카라쿠시는 알 무자파르 타키 알딘 우마르의 지휘관으로, 이 전선에서 대부분의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1172년에 시와를 점령했고 1174년 이전에 키레나이카를 정복했다. 그는 그 후 트리폴리를 튀르크와 쿠르드족 군대와 함께 정복했고, 이 지역의 일부 베두인 부족의 아랍 군대가 합류했다. 트리폴리 점령의 정확한 날짜는 불확실하지만, 1170년대 또는 1180년대 초에 일어났다.

1173년 살라딘은 예멘과 헤자즈를 정복하기 위해 투란-샤를 보냈다. 1174년 5월, 투란-샤는 자비드를 정복했고, 그해 말 아덴을 점령했다.[40] 아덴은 인도양에서 왕조의 주요 해상 항구가 되었고, 예멘의 주요 도시가 되었지만,[42] 아이유브 예멘의 공식 수도는 타이즈였다.[41] 투란-샤는 함단의 마지막 통치자들을 사나에서 몰아내고, 1175년에 산악 도시를 정복했다.[40] 예멘 정복으로 아이유브 왕조는 해안 함대를 개발하여 해안을 보호하고 해적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했다.[44] 아이유브 왕조는 세 개의 독립 국가(자비드, 아덴, 사나)를 하나의 권력 아래 통합했기 때문에 예멘에게 큰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1176년 투란-샤가 예멘 총독직에서 물러나자, 영토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1182년 살라딘이 그의 다른 형제인 투그테킨 사이프 알-이슬람을 예멘 총독으로 임명할 때까지 진압되지 않았다.[40] 예멘의 아이유브 ''나이프''(부총독) 우스만 알-잔질리는 투란-샤가 예멘으로 돌아온 1180년에 하드라무트의 대부분을 정복했다.[45]

이집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이유브 왕조는 이집트가 의존하는 홍해 무역로를 지배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얀부가 위치한 헤자즈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고 했다.[46] 아이유브 왕조는 또한 칼리파 내에서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메디나에 대한 주권을 가짐으로써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했다.[46] 살라딘이 수행한 정복과 경제적 진보는 실제로 이집트의 지역 패권을 확립했다.[47]

살라딘은 여전히 명목상 누르 앗딘의 봉신이었지만, 점차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채택했다. 이러한 독립성은 1174년 누르 앗딘의 죽음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26] 그 후 살라딘은 젠기드로부터 시리아를 정복하기 시작했고, 11월 23일 그는 도시의 총독에 의해 다마스쿠스에서 환영받았다. 1175년까지 그는 하마홈스를 장악했지만 알레포를 점령하지 못했다.[48] 살라딘의 성공은 당시 젠기드의 수장이었던 사이프 알딘 모술의 아미르를 불안하게 만들었는데, 그는 시리아를 자신의 가족 재산으로 간주했고, 누르 앗딘의 전 하인에 의해 찬탈당하고 있다는 것에 분노했다. 그는 하마 근처에서 살라딘과 대적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다.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살라딘과 그의 베테랑 병사들은 젠기드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48] 승리 후 살라딘은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하고 아스 살리 이스마일 알 말리크 (누르 앗딘의 청소년 아들)의 이름을 금요 예배와 이슬람 주화에서 없애고 자신의 이름으로 대체했다. 아바스 칼리프 알 무스타디는 살라딘의 권력 장악을 기꺼이 환영했고 그에게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50]

1176년 봄, 젠기드와 아이유브 왕조 사이에 또 다른 주요 대결이 일어났는데, 이번에는 알레포에서 떨어진 술탄의 언덕에서였다. 살라딘은 다시 승리했지만, 사이프 알딘은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다. 아이유브 왕조는 북부의 다른 시리아 도시들을 정복했지만 두 번째 포위 공격 동안 알레포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알레포의 총독 구무슈티긴과 히슨 카이파와 마르딘의 그의 동맹은 시리아에서 아이유브 왕조의 소유에 대한 살라딘을 군주로 인정하는 반면 살라딘은 구무슈티긴과 아스 살리 알 말리크가 알레포에 대한 통치를 계속하도록 허용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51]

1182년 5월, 살라딘은 짧은 포위 공격 후 알레포를 점령했다. 도시의 새로운 총독인 이마드 알딘 장기 2세는 백성들로부터 인기가 없었고, 살라딘이 장기 2세가 이전 신자르, 라카, 누사이빈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는 데 동의한 후 알레포를 항복했는데, 그 후 아이유브 왕조의 봉신 영토로 봉사하게 되었다.[60] 알레포는 6월 12일 공식적으로 아이유브 왕조의 손에 들어갔다. 그 다음 날, 살라딘은 십자군이 점령한 안티오크 근처의 하림으로 진군하여 도시를 점령했고, 수르하크는 잠시 구금되었다가 알 무자파르 우마르에 의해 석방되었다.[61] 알레포의 항복과 살라딘과 장기 2세의 충성은 이즈 알딘 알 마수드 모술을 아이유브 왕조의 유일한 주요 이슬람 경쟁자로 남겨두었다.

1230년 아이유브 가문의 지배 하에 있던 히라트가 잘랄 웃 딘에 의해 점령된 후, 아슈라프는 룸 셀주크 왕조와 동맹을 맺고, 에르진잔 근교의 전투에서 아이유브 왕조·셀주크 왕조의 연합군은 잘랄 웃 딘을 격파했다. 1231년 몽골군의 침략에 고통받던 칼리프 알-무스탄시르는 이슬람 제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아이유브 왕조 영토도 몽골군에 의한 약탈의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카밀은 메소포타미아 원정을 결의했다.[252] 몽골군이 히라트에서 철수했다는 것을 알게 된 카밀은 진군을 중지하고, 진로를 바꿔 디야르바크르를 포위했다.[252] 1232년 10월 디야르바크르를 점령한 카밀은 그 도시를 아들 아스-살리에게 주고, 히슨 카이파를 공략하여 원정을 마쳤다.[252]

2. 3. 2. 십자군과의 전쟁

살라흐 앗 딘은 십자군과의 전쟁을 계속하여 예루살렘을 다시 이슬람의 영토로 회복하였고, 이에 반발하여 침공한 제3차 십자군에 맞서 싸웠다. 살라흐 앗 딘의 치세에 아이유브조는 이슬람을 하나의 기치 아래 통일하고 오랜 분열을 끝냈다.[23]

1170년대 내내, 아이유브 왕조는 서쪽으로 계속 진출했다. 샤라프 알딘 카라쿠시는 알 무자파르 타키 알딘 우마르의 지휘관으로, 이 전선에서 대부분의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1172년에 시와를 점령했고 1174년 이전에 키레나이카를 정복했다. 그는 그 후 트리폴리를 튀르크와 쿠르드족 군대와 함께 정복했고, 이 지역의 일부 베두인 부족의 아랍 군대가 합류했다. 트리폴리 점령의 정확한 날짜는 불확실하지만, 1170년대 또는 1180년대 초에 일어났다. 일부 아이유브 군대가 레반트에서 십자군과 싸우는 동안, 카라쿠시의 군대는 1185~1186년까지 이프리키야(현재의 튀니지)의 대부분을 알모하드 왕조로부터 점령했다. 이 시점에서 카라쿠시는 알모하드의 또 다른 적대 세력인 알리 이븐 가니야가 이끄는 바누 가니야와 동맹을 맺었다. 알모하드 칼리프 야쿱 알만수르는 1187년부터 1188년까지 이프리키야를 재정복하여 둘 모두를 격파했다. 아이유브 왕조는 이후 마그레브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

1169년 다미에타를 침공한 십자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23] 1177년에 살라딘은 십자군 연대기 작가 윌리엄 오브 타이어에 따르면 약 26,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 왕국의 대부분의 군대가 알레포 서쪽 하렘, 시리아을 포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부 팔레스타인으로 진군했다. 라믈라 근처에서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 휘하의 템플 기사단에 갑작스럽게 공격을 받은 아이유브 왕조 군대는 몽기사르 전투에서 패배했고, 군대의 대부분이 죽었다. 살라딘은 이듬해 홈스에 야영했고 파루크 샤가 지휘하는 그의 군대와 십자군 사이에 많은 소규모 전투가 발생했다.[58] 굴하지 않고 살라딘은 서쪽에서 십자군 국가를 침공하여 1179년 마르지 아윤 전투에서 보두앵을 격파했다. 다음 해 그는 샤텔레라는 새롭게 건설된 십자군 성을 야곱의 여울 전투에서 파괴했다. 1182년의 캠페인에서 그는 카우카브 알 하와의 미결정적인 벨부아 성 전투에서 다시 보두앵과 맞붙었다.[59]

1183년 여름, 동부 갈릴리를 황폐화시킨 후 살라딘의 약탈은 그와 루시냥의 가이 휘하의 십자군 사이의 알 풀 전투로 정점을 이루었다. 대부분의 백병전은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끝났다. 두 군대는 서로 1마일 떨어진 곳으로 물러났고 십자군은 내부 문제를 논의하는 동안 살라딘은 골란 고원을 점령하여 십자군을 주요 공급원으로부터 차단했다. 1183년 10월, 그리고 1184년 8월 13일 살라딘과 알 아딜은 십자군이 점령한 카라크를 포위했지만 점령할 수 없었다. 그 후 아이유브 왕조는 사마리아를 약탈하고 나블루스를 불태웠다. 살라딘은 1184년 9월에 다마스쿠스로 돌아왔고 그 후 1184-1185년에 십자군 국가와 아이유브 제국 사이에 상대적인 평화가 뒤따랐다.[64]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상대로 승리한 후 사실상 예루살렘 왕국 전체가 아이유브 왕조의 손에 넘어갔다. 삽화, ''프랑스인들이 투르크족과 기타 사라센인, 해외 무어인들을 상대로 해외에서 수행한 원정'', c. 1490


살라딘은 1187년 7월 3일 동쪽 갈릴리의 티베리아스를 포위했고, 십자군 군대는 카프르 카나를 통해 아이유브 왕조를 공격하려 했다. 십자군의 행군 소식을 들은 살라딘은 근위병을 이끌고 카프르 사브트의 주요 야영지로 돌아갔고, 티베리아스에는 소규모 병력을 남겨두었다. 십자군 군대를 훤히 바라본 살라딘은 알-무자파르 우마르에게 히틴 근처에 자리를 잡고 십자군의 진입을 막도록 명령했고, 괴크뵈리와 그의 군대는 알-샤자라 근처 언덕에 주둔했다. 7월 4일 십자군은 하틴의 뿔을 향해 진격하여 무슬림 군대를 공격했지만 압도당해 하틴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전투 나흘 후 살라딘은 알-아딜을 초대하여 팔레스타인, 갈릴리, 레바논 해안을 재정복하는 데 동참시켰다. 7월 8일 십자군 요새 아크레가 살라딘에게 점령되었고, 그의 군대는 나사렛과 사푸리야를 점령했으며, 다른 부대는 하이파, 카이사레아, 세바스티야와 나블루스를 점령했고, 알-아딜은 미라벨자파를 정복했다. 7월 26일, 살라딘은 해안으로 돌아와 사레프타, 시돈, 베이루트, 자블레의 항복을 받았다.[66] 8월에 아이유브 왕조는 람라, 데르 엘-발라, 가자 시티, 바이트 지브린, 라트룬을 정복했다. 아스칼론은 9월 4일에 점령되었다.[67] 1187년 9월에서 10월 사이에 아이유브 왕조는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발리안 드 이벨린과의 협상 끝에 10월 2일에 점령했다.[68]

카락과 몬트 로열은 트란스요르단에서 곧 함락되었고, 뒤이어 북동부 갈릴리의 사파드가 함락되었다. 1187년 말까지 아이유브 왕조는 레반트의 십자군 왕국 전체를 사실상 장악했으며, 티레는 몬페라토의 콘라드의 지휘하에 저항을 지속했다. 1187년 12월, 살라딘과 그의 형제들(알레포, 하마, 이집트)의 수비대로 구성된 아이유브 왕조 군대가 티레를 포위했다. 12월 29일 콘라드의 군대에 의해 무슬림 해군 함대의 절반이 점령되었고, 뒤이어 도시 해안에서 아이유브 왕조가 패배했다. 1188년 1월 1일, 살라딘은 트리폴리에서 철수하는 데 동의하는 군사 회의를 열었다.[69]

교황 그레고리 8세는 1189년 초 무슬림에 대항하는 제3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을 재정복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한편, 그 해 십자군과 아이유브 왕조는 아크레 근처에서 전투를 벌였고, 유럽에서 온 증원군이 합류했다. 1189년부터 1191년까지 십자군은 아크레를 포위했고, 초기 무슬림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에게 함락되었다. 2,700명의 무슬림 전쟁 포로가 학살되었고, 십자군은 남쪽의 아스칼론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70]

아이유브 왕조는 아크레에서 십자군의 해상 봉쇄와 바다를 통해 도착하는 십자군 증원군의 꾸준한 흐름에 직면함에 따라 살라딘은 지중해에서 가장 큰 해군을 보유했던 알모아드 왕조의 지원을 구했다. 1189~1190년, 그는 야쿠브 알-만수르에게 팔레스타인에서 해군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알모아드 칼리프는 이를 거절했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거절에 대해 알-안달루스에 대한 알모아드 왕조의 집중, 두 무슬림 국가 간의 이념적 차이, 그리고 카라쿠쉬의 이프리키야 침공으로 인한 불신 등 다양한 설명을 제시했다.

이제 리처드의 통일 지휘 하에 있는 십자군은 아르수프 전투에서 살라딘을 격파하여 십자군이 자파와 팔레스타인 해안 지역의 대부분을 정복할 수 있었지만, 내륙 지역을 회복할 수는 없었다. 대신 리처드는 1192년 살라딘과 라믈라 조약을 체결하여 예루살렘 왕국을 자파와 베이루트 사이의 해안 지역으로 복원했다. 이는 살라딘 생애 마지막 주요 전쟁 노력으로, 그는 이듬해인 1193년에 사망했다.

1218년 8월 24일, 이집트의 항구 도시 다미에타(디므야트)가 십자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8월 말에 알-아딜은 카이로에서 사망했다.

다미에타 반환을 원하는 카밀은 예루살렘과 살라딘이 획득한 "진정한 십자가"의 반환, 모든 포로의 석방 등의 조건을 내걸고 평화를 제안했다.[236] 십자군 내부에서는 평화를 받아들일지 여부에 대해 논쟁이 벌어졌고, 추기경 펠라기우스, 템플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의 의견이 우세하여 제안은 거부되고 전쟁은 지속되었다.[237] 1219년 11월 다미에타는 함락되었고, 1221년 여름에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떠나 진군을 재개했다. 한편, 메소포타미아의 아슈라프, 다마스쿠스의 무아잠 등 지방의 왕족들은 훔스에 모여 십자군에 대한 대응을 협의하고, 이집트를 구원하러 갔다.[238] 1221년 8월 십자군은 진군 중 나일강의 범람에 휘말려 괴멸되었고, 이집트군은 괴멸된 적군을 추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8월 30일 양군 간에 평화가 맺어졌고, 이듬해 9월에 다미에타는 이집트에 반환되었다.[239]

한편, 유럽 세계에서는 1225년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예루살렘 왕위 계승권을 획득했고,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 왕국에서의 영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십자군 실시를 서약했다.[242] 한편 카밀은 관계가 악화된 다마스쿠스의 무아잠에 대항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2세와의 동맹 체결을 시도했다.[243][242] 카밀과 프리드리히 2세는 서신을 통해 학문적인 논쟁을 벌였고, 카밀은 동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프리드리히 2세에게 곰, 원숭이, 낙타, 코끼리(크레모나의 코끼리)를 선물했다.[244] 1229년 2월 야파에서 쌍방의 종교적 관용을 조건으로 하는 십자군에 대한 예루살렘 반환을 약속하는 협정이 체결되었고,[245] 예루살렘에서는 이슬람 예배가 계속되었다.[246] 십자군 국가의 귀족과 기사단은 프리드리히가 예루살렘 반환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에 실망했지만,[247][248] 카밀의 행동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배신으로 비난받았다.[243]

1249년,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이끄는 십자군이 다미에타를 습격하여 도시를 점령했다(제7차 십자군). 십자군의 습격 당시 병상에 있던 살리흐는 예루살렘 반환과 교환하여 십자군의 다미에타 철수를 제안했지만, 루이 9세는 살리흐의 제안을 거부하고, 살리흐는 만수라로 이동하여 요격 태세를 갖추었다.[261] 같은 해 10월 살리흐는 사망하고, 살리흐의 아들인 무아잠 투란 샤가 주둔지인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로 귀국할 때까지 살리흐의 미망인 샤자르 앗 두르가 대리로서 정무를 수행했다. 살리흐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정해진 시간에 식사와 약이 병실로 옮겨졌으며, 가짜 살리흐의 서명이 있는 명령이 발해졌다.[262] 프랑스군은 다미에타에서 만수라로 진군했지만, 2월 9일 장군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바흐리 맘루크 군단이 만수라 전투에서 십자군에 승리했다. 2월 투란 샤는 이집트로 귀국하여 샤자르 앗 두르로부터 국정을 양도받았다. 4월 7일 궁지에 몰린 프랑스군은 이집트군에 항복했고, 포로가 된 루이 9세는 만수라의 저택에 구류되었다.

2. 3. 3. 예루살렘 탈환

1163년 이집트를 지배하던 시아파 국가 파티마 왕조의 재상 샤와르는 정적 디르감과의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장기 왕조에 원조를 요청했다.[172][173] 1164년 4월, 누르 앗딘시르쿠를 사령관으로 하는 원정군을 파견했고, 원정군의 막료로 살라딘이 임명되었다. 시르쿠는 빌바이스에서 디르감에게 승리하고 샤와르를 재상으로 복직시켰다. 그러나 시르쿠를 두려워한 샤와르는 그에게 이집트에서 철수를 요구했고, 십자군 국가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 1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174][175] 1167년에 시르쿠와 살라딘은 다시 이집트 원정을 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같은 해 8월에 강화 조약을 맺고 철병한다.

1167년의 강화 조약 때 샤와르는 예루살렘 왕국에 공납을 대가로 원조 약속을 받아냈지만,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알-아디드와 민중은 샤와르의 방침에 불만을 품었고, 샤와르를 제거하려는 계획이 세워졌다.[176][177] 게다가 이집트는 십자군의 공격을 받아 푸스타트가 십자군에 의해 제압될 것을 두려워한 샤와르는 푸스타트에 불을 질렀고, 푸스타트는 잿더미가 되었다.[178][179] 샤와르와 적대하는 파벌의 인물은 누르 앗딘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1168년 12월에 시르쿠와 살라딘은 알레포를 출발하여 세 번째 이집트 원정을 시작했고, 시르쿠의 진군을 알게 된 아모리 1세는 팔레스타인으로 철수했다.[180] 다음 해 1169년 1월에 시르쿠 군은 카이로에 입성했고, 샤와르는 알-아디드의 명령에 따라 처형된다.[181][182] 시르쿠는 샤와르를 대신하여 파티마 왕조의 와지르(재상)·군사령관에 취임했지만, 1169년 3월 시르쿠는 급사하고, 살라딘이 재상직을 계승했다.[183][184][185] 재상에 취임한 후 살라딘은 "말리크 알 나시르(승리의 왕)"라는 칭호를 사용했다.[186]

1171년 9월 4일, 살라딘은 푸스타트의 모스크에서 열리는 금요 예배에서 후트바(설교)에서 알-아디드의 이름을 빼고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무스타디의 이름을 넣도록 명령하여, 이집트에서 수니파의 부활을 표명했다.[194] 9월 10일에는 카이로의 금요 예배에서도 동일한 후트바가 낭독되었고, 이집트 각지에서 수니파의 부활은 받아들여졌다.[194] 같은 해 9월 15일에 병상에 있던 알-아디드는 사망하고, 파티마 왕조는 멸망한다.[195]

1187년 초, 살라딘은 수차례에 걸쳐 평화 협정을 위반한 카락의 르노 드 샤티용의 배신 행위를 비난하고, 3월에 지하드(성전)를 선언했다.[213] 7월 4일에 하틴에서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 기 드 뤼지냥이 이끄는 십자군과 교전하여 승리를 거둔다 (하틴 전투).[214] 베이루트, 사이다 등의 도시가 아이유브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9월까지 지중해 연안부의 시리아 여러 도시 대다수가 이슬람 세력의 손에 들어갔다.[214] 9월 20일부터 살라딘은 예루살렘 포위를 시작했고, 몸값을 받는 조건으로 예루살렘 주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을 조건으로 예루살렘의 개방이 결정되었다.[215] 10월 2일에 살라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바위의 돔에서는 이슬람 예배가 거행되었다.[216]

예루살렘 개방을 둘러싼 살라딘과 기독교도 간의 협상


한 달 동안 살라딘은 예루살렘에 머물며 도시의 치안을 회복했고, 십자군이 사용하던 시설을 모스크마드라사로 개축했다. 가톨릭 신자는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지만, 동방 정교회 신자는 도시에 남았으며, 십자군 시대에 도시에서 추방되었던 유대인이 귀환했다.[217]

2. 4. 분열과 재통합

1169년 살라흐 앗 딘이 삼촌 시르쿠와 함께 장기 왕조를 위해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아이유브 왕조가 시작되었다. 아이유브라는 이름은 시르쿠의 형제이자 살라흐 앗 딘의 아버지인 나짐 앗딘 아이유브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삼촌 시르쿠가 죽은 후, 살라흐 앗 딘은 빠르게 이집트를 장악하고 1169년 다미에타를 침공한 십자군을 몰아냈다. 1171년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알아디드가 죽자 파티마 왕조를 폐위시켰다. 1174년 자신의 주군 누르 앗 딘이 죽은 후에는 시리아다마스쿠스를 복속하여 이슬람의 유력자가 되었다. 살라흐 앗 딘은 십자군과의 전쟁을 계속하여 예루살렘을 다시 이슬람 영토로 회복하였고, 이에 반발하여 침공한 제3차 십자군에 맞서 싸웠다. 살라흐 앗 딘의 치세에 아이유브 왕조는 이슬람을 통일하고 오랜 분열을 끝냈다.

1200–1210년의 알렉산드리아 카디, ''마카마트 알-하리리''(BNF 3929)에 따르면


그러나 1193년 살라흐 앗딘이 죽자, 아이유브 왕조는 상속자들에 의해 분열되고 그 힘이 점차 약해졌다. 살라흐 앗 딘 사후, 친척과 가신들에게 영토가 분배되면서 통일 왕조는 유지되지 못하고, 각자의 영지에서 자치적인 성격으로 분권화가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왕조는 봉건적인 가문 연합체로 성격이 바뀌었다.

살라흐 앗 딘의 형제인 알아딜과 그의 아들 알카밀 시대에는 아이유브 왕조는 힘이 약해져 잠시 예루살렘을 십자군에게 내주기도 하였다. 알카밀의 아들 살리흐가 죽은 이후 아이유브 왕조는 완전히 힘을 잃고 노예 출신의 맘루크 왕조로 대체된다.


2. 4. 1. 살라딘 사후의 분열

1193년 살라딘이 죽자 아이유브 왕조는 살라딘의 후계자들에 의해 각각 상속되었는데, 이후 분열되고 그 힘이 점차 약해졌다. 살라딘 사후에 친척과 가신들에게 영토가 분배되자 통일 왕조로 유지되지 못하고, 각자의 영지에서 자치적 성격의 분권화가 진행되어 봉건적인 가문 연합체로 왕조의 성격이 바뀌었다.[225]

살라딘의 후계자는 장남인 알 아프달로 여겨졌지만, 영토는 아이유브 왕조의 왕족에 의해 다음과 같이 분할되었다. 각 지역 통치자는 휘하 군인에게 이크타를 수여하는 체제를 갖추었다.[225]

인물영토
알 아프달다마스쿠스, 예루살렘, 바알베크, 해안 지대
알 아지즈 (살라딘의 아들)이집트
알 말리크 알 자히르 (살라딘의 아들)알레포
알 아딜 (살라딘의 동생)카라크, 샤우바크, 디야르바크르
만수르 (살라딘의 조카)하마
시르쿠프 (1169년에 사망한 시르쿠의 손자)호므스



아프달은 바그다드나시르에게 자신의 지배 정당성을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답변을 얻지 못했다. 이윽고 아프달 휘하의 에미르들은 알 아지즈를 지지하게 되었다.[226] 1194년 봄, 아지즈는 군주 권력의 상징인 후트바와 화폐에 이름을 넣을 권리를 양도하도록 아프달을 압박했고, 양자 간에는 무력 충돌 직전까지 이르렀다.[164] 각자가 기존 영토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타협이 성립되었지만, 각지의 왕족은 독립된 정권을 수립했고, 아이유브 왕조는 사실상 분열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164]

1196년 7월, 알 아딜은 아프달을 다마스쿠스에서 추방했고, 1198년 11월에 아지즈가 사냥 중 사고사하자 그의 영지인 이집트를 세력 하에 두었다.[230] 이집트 지배를 확립한 아딜은 일족 사이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살라딘이 사용하지 않았던[231] 술탄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161]

1218년 8월 말, 알 아딜은 카이로에서 사망했다. 아딜 사후 그의 아들들이 영토를 분할 상속하여 알 카밀이 이집트를, 알 무아잠이 다마스쿠스를, 알 아슈라프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했다.[234] 그리고 호므스, 하마, 예멘에는 아딜 일족 외의 아이유브 가문의 사람들이 할거했다.[235]

1238년 알 카밀이 사망한 후, 아스 살리와 알 아딜 2세 형제에 의해 국토가 분할되었고,[254] 하산케이프의 살리흐는 카이로에서 술탄을 칭한 동생 아딜과 이집트 지배를 두고 다투었다. 1240년 5월, 살리흐는 아딜을 폐위하고 술탄에 즉위했다.

1249년 10월, 병상에 있던 살리흐는 사망했고, 그의 아들 무아잠 투란 샤가 주둔지인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로 귀국할 때까지 살리흐의 미망인 샤자르 앗 두르가 대리로서 정무를 수행했다. 1250년 5월 2일, 투란 샤는 암살되어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는 멸망한다.[263] 투란 샤 사망 후, 샤자르 앗 두르를 군주로 하는 정권이 수립되어 맘루크 왕조가 성립했다.

2. 4. 2. 알 아딜의 재통합

1193년 살라흐 앗 딘(살라딘)이 죽자, 아이유브 술탄국은 그의 후계자들 사이에 분할 상속되었고, 이후 각 영지는 분열되어 그 힘이 점차 약해졌다. 살라흐 앗 딘 사후, 그의 친척과 가신들에게 영토가 분배되면서 통일 왕조는 유지되지 못하고, 각자의 영지에서 자치적인 성격의 분권화가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왕조는 봉건적인 가문 연합체로 성격이 바뀌었다.

살라딘은 중앙집권적인 제국을 건설하기보다는 자신의 영토에 세습적 소유권을 확립하고 제국을 친족들에게 분할하여 가족 구성원이 반자치 영지 및 공국을 통치하도록 했다.[26] 이 왕자들(아미르)은 아이유브 술탄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자신들의 영토에서 비교적 독립성을 유지했다.[71] 살라딘이 죽자 아즈-자히르는 알-아딜의 합의에 따라 알레포를, 알-아지즈 우스만은 카이로를 차지했으며, 그의 맏아들 알-아프달은 다마스쿠스를 유지했다.[72] 이 지역은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산맥의 상당 부분을 포함했다.[73] 알-아딜은 이후 알-자지라(상 메소포타미아)를 획득하여 모술의 잔기드를 저지했다. 1193년, 모술의 마스우드는 신자르의 잔기 2세와 연합하여 잔기드 연합이 알-자지라를 정복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주요 결과가 나오기 전에 마스우드는 병에 걸려 모술로 돌아갔고, 알-아딜은 잔기드군이 아이유브군에게 영토 손실을 입기 전에 잔기에게 즉각적인 평화를 강요했다.[62] 알-아딜의 아들 알-무아잠은 카라크트란스요르단을 차지했다.[72]

그러나 곧 살라딘의 아들들은 제국 분할을 놓고 다투었다. 알-아프달은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그의 아버지 부하 아미르들은 카이로의 우스만에게 그가 경험이 없고 아이유브 구 세력을 몰아내려 한다고 주장하며 그를 몰아내라고 로비했다. 알-아딜은 알-아프달의 무능함이 아이유브 제국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스만에게 행동을 장려했다. 1194년에 우스만은 공개적으로 술탄을 요구했고, 1196년 다마스쿠스 공격으로 알-아프달은 살카드의 작은 지위로 떠나게 되었다. 알-아딜은 우스만의 부관으로 다마스쿠스에 자리를 잡았지만, 제국 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73]

우스만이 카이로 근처에서 사냥 사고로 사망하자 알-아프달은 다시 술탄이 되었고 (우스만의 아들 알-만수르는 이집트의 명목상 통치자), 알-아딜은 북동쪽에서 작전을 수행하느라 부재 중이었다. 알-아딜은 다마스쿠스 요새를 점령했지만, 알-아프달과 그의 형제 아즈-자히르의 알레포 연합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 군대는 알-아프달의 지휘 아래 붕괴되었고, 1200년에 알-아딜은 공세를 재개했다.[74] 우스만이 사망하자 두 개의 맘루크(노예 병사) 씨족(시르쿠흐와 살라딘이 매수한 아사디야와 살라히야)이 충돌했고, 살라히야는 알-아프달에 맞서 싸우는 알-아딜을 지지했다. 그들의 지원으로 알-아딜은 1200년에 카이로를 정복했고,[75] 알-아프달에게 국내 추방을 강요했다.[74] 그는 스스로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이라고 선포하고, 다마스쿠스의 통치를 알-무아잠에게, 알-자지라의 통치를 그의 다른 아들 알-카밀에게 위임했다.[75] 1200년경, 샤리프(무함마드 관련 부족장) 카타다 이븐 이드리스는 메카에서 권력을 잡았고, 알-아딜에 의해 그 도시의 아미르로 인정받았다.[46]

알-아프달은 다마스쿠스를 차지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알-아딜은 1201년에 승리의 행진으로 도시에 들어갔다.[74] 이후 알-아딜의 가문은 50년 동안 아이유브 왕조를 지배했다.[74] 아즈-자히르는 알레포를 차지하고, 알-아프달은 아나톨리아의 사모사타를 받았다.[75] 알-아딜은 그의 재산을 아들들 사이에 재분배했다. 알-카밀은 이집트에서 그를 계승하고, 알-아슈라프는 알-자지라, 알-아와드는 디야르 바크르를 받았지만, 알-아와드가 죽은 후 마지막 영토는 알-아슈라프에게 옮겨졌다.[75]

알-아딜은 십자군을 무시한 것으로 다마스쿠스의 한발리 로비로부터 공개적인 적대감을 받았으며, 그들에 대한 작전은 한 번만 수행했다. 장기간의 작전은 일관된 무슬림 연합을 유지하는 어려움을 수반했다. 알-아딜 시대의 추세는 주로 알-자지라에서 아이유브의 권위를 확장하고 샤-아르멘 영토(동부 아나톨리아)를 통합함으로써 제국의 꾸준한 성장세였다. 아바스 왕조는 1207년에 술탄으로서 알-아딜의 역할을 인정했다.[74]

1208년경, 조지아 왕국은 동부 아나톨리아에서 아이유브 통치에 도전했고, 킬라트를 포위했다. 알-아딜은 알-아와드를 지원하기 위해 홈스, 하마, 바알베크의 아미르와 다른 아이유브 공국 병력을 포함한 대규모 무슬림 군대를 소집하여 직접 이끌었다. 포위 공격 중 조지아 장군 이바네 므카르그르델리는 실수로 킬라트 외곽에서 알-아와드의 손에 떨어졌고, 조지아군이 30년 휴전에 서명한 후에야 1210년에 석방되었다. 이 휴전으로 아이유브 아르메니아에 대한 조지아의 위협이 끝났고,[76] 반 호 지역은 다마스쿠스의 아이유브에게 남겨졌다.

1217년 11월 3일, 십자군 군사 작전이 시작되어 트란스요르단으로 공세를 시작했다. 알-무아잠은 알-아딜에게 반격을 촉구했지만, 그는 거부했다.[77] 1218년, 나일 삼각주의 다미에타 요새는 십자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두 번의 실패 시도 끝에 요새는 8월 25일에 항복했다. 6일 후 알-아딜은 다미에타의 손실에 충격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78]

2. 4. 3. 제5차 십자군과 예루살렘 양도

1192년 9월 2일, 살라딘과 리처드 1세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야파 이북의 연안 지역은 십자군이, 아슈켈론 이남은 이슬람 세력이 영유하게 되었고, 기독교 순례자들의 예루살렘 방문이 허가되었다.[221][222]

1218년, 나일 삼각주의 다미에타 요새는 십자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두 번의 실패 끝에 요새는 결국 항복했다. 알 카밀은 다미에타를 되찾으려 했지만, 브리엔의 존에게 밀려났다. 아이유브는 다미에타 철수를 조건으로 팔레스타인을 예루살렘 왕국에 반환할 것을 제안했지만, 몽 레알과 카라크 요새는 제외했다.[79] 이 제안은 제5차 십자군의 지도자 알바노의 펠라기우스에 의해 거부되었고, 1221년에 십자군은 만수라에서 아이유브의 승리 이후 나일 삼각주에서 쫓겨났다.[26]

2. 5. 쇠퇴와 멸망

1193년 살라딘이 사망하면서 아이유브 왕조는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분할 상속되었고, 각자의 영지에서 자치적인 성격을 띠며 분권화가 진행되어 왕조의 성격은 봉건적인 가문 연합체로 바뀌었다.[97] 살라딘의 형제인 알아딜과 그의 아들 알카밀 시대에는 제6차 십자군에게 예루살렘을 잠시 내주기도 했다. 알카밀의 아들 살리흐가 죽은 후 아이유브 왕조는 완전히 힘을 잃고 맘루크 왕조로 대체되었다.[71]

알 아쉬라프의 다마스쿠스 통치는 안정적이었지만, 그와 시리아의 다른 ''아미르''들은 카이로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려 했다. 1237년 8월, 알 아쉬라프가 사망하고 그의 형제 아스 살리흐 이스마일이 계승했다. 1238년 알 카밀이 사망하자, 그의 장남 아스 살리흐 아이유브는 카이로에서 그의 동생 알 아딜 2세가 술탄으로 선포된 것에 이의를 제기했고, 결국 1238년 12월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그러나 그의 삼촌 이스마일은 1239년 9월에 도시를 되찾았다. 이스마일은 안 나시르 다우드와 동맹을 맺었고, 1240년 5월 알 아딜 2세를 대신하여 스스로 술탄을 선포했다.

1250년 맘루크들이 이집트를 장악하고, 안나시르 유수프는 시리아에서 맘루크에 대항하여 아이유브 왕조의 우위를 회복하려 했다. 그는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하부르 강에서 시나이 반도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했지만, 1250년 12월 이집트 공격에서 아이바크 군대에 대패했다. 1253년 4월, 맘루크와 안나시르 유수프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어 아이유브 왕조는 이집트에서 공식적으로 종말을 맞이했다.[99] 이후에도 분쟁은 계속되었지만, 1256년 12월 11일 안나시르 유수프는 알무스타심에게 "술탄" 칭호를 요청하며 맘루크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했다.

1257년 초, 아이바크가 살해되고 알만수르 알리가 뒤를 이었으나, 안나시르 유수프와 관련된 음모가 발각되었다. 시리아의 바흐리 맘루크는 안나시르 유수프에게 이집트 침공을 압박했지만, 그는 자신의 왕위 찬탈을 두려워하여 행동하지 않았다. 1257년 10월, 바이바르스와 맘루크들은 다마스쿠스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이동했고, 알 아크사 사원(Al-Aqsa Mosque)에서 쿠트바를 통해 카라크의 아미르 알무기스 우마르를 선포했다.[101] 1258년 초, 알무기스 우마르와 바이바르스는 군대를 시나이로 파견했지만, 이집트의 맘루크에게 다시 패배했다.[102]

2. 5. 1. 맘루크의 발흥

1169년 살라흐 앗 딘이 삼촌 시르쿠와 함께 장기 왕조를 위해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아이유브 왕조가 세워졌다. 아이유브라는 이름은 시르쿠의 형제이자 살라흐 앗 딘의 아버지인 나짐 앗딘 아이유브의 이름에서 유래한다.[26]

시르쿠가 사망한 후, 살라흐 앗 딘은 빠르게 이집트를 장악하고 1169년 다미에타를 침공한 십자군을 몰아냈다. 1171년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알아디드가 죽자 파티마 왕조를 폐위시켰다. 1174년 자신의 주군 누르 앗 딘이 사망하자, 시리아다마스쿠스를 복속하여 이슬람의 최대 강자가 되었다.

살라흐 앗 딘은 십자군과 전쟁을 계속하여 예루살렘을 다시 이슬람 영토로 회복하였고, 이에 반발하여 침공한 제3차 십자군에 맞서 싸웠다. 살라흐 앗 딘의 치세에 아이유브 왕조는 이슬람을 하나의 기치 아래 통일하고 오랜 분열을 끝냈다.

그러나 1193년 살라흐 앗딘이 죽자 아이유브 왕조는 그의 후계자들에게 상속되었으나, 이후 분열되고 그 힘이 점차 약해졌다. 살라흐 앗 딘 사후 친척과 가신들에게 영토가 분배되면서 통일 왕조는 유지되지 못하고 각자의 영지에서 자치적인 분권화가 진행되었고, 왕조는 봉건적인 가문 연합체로 성격이 바뀌었다.

살라흐 앗 딘의 형제 알아딜과 그의 아들 알카밀 시대에는 아이유브 왕조의 힘이 약해져 잠시 예루살렘을 십자군에게 내주기도 하였다. 알카밀의 아들 살리흐가 죽은 후 아이유브 왕조는 완전히 힘을 잃고 노예 출신 맘루크 왕조로 대체되었다.

2. 5. 2. 맘루크 왕조의 성립

1169년 살라흐 앗 딘은 삼촌 시르쿠와 함께 장기 왕조를 위해 이집트를 정복했다. 아이유브라는 이름은 시르쿠의 형제이자 살라흐 앗 딘의 아버지인 나짐 앗딘 아이유브의 이름에서 기원한다.[23]

시르쿠가 사망한 후, 살라흐 앗 딘은 빠르게 이집트를 장악하고 1169년 다미에타를 침공한 십자군을 몰아냈다. 1171년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알아디드가 죽자 파티마 왕조를 폐위시켰다.[26] 1174년 자신의 주군 누르 앗 딘이 죽은 후에는 시리아다마스쿠스를 복속하여 이슬람의 최대 강자가 되었다. 살라흐 앗 딘은 십자군과의 전쟁을 계속하여 예루살렘을 다시 이슬람의 영토로 회복하였고, 이에 반발하여 침공한 제3차 십자군에 맞서 싸웠다. 살라흐 앗 딘의 치세에 아이유브 왕조는 이슬람을 하나의 기치 아래 통일하고 오랜 분열을 끝냈다.

1193년 살라흐 앗딘이 죽은 후, 아이유브 왕조는 살라흐 앗 딘의 후계자들에게 상속되어 분열되고 그 힘이 점차 약해졌다. 살라흐 앗 딘의 형제인 알아딜과 그의 아들 알카밀 시대에는 잠시 예루살렘을 십자군에게 내주기도 하였다. 알카밀의 아들 살리흐가 죽은 이후 아이유브 왕조는 완전히 힘을 잃고 노예 출신의 맘루크 왕조로 대체된다.[71]

2. 5. 3. 몽골의 침입과 잔존 세력

1240년대 초, 아스 살리흐 아이유브는 알 아딜 2세를 지지한 자들에게 보복했고, 이후 다마스쿠스의 아스 살리흐 이스마일과 화해한 안 나시르 다우드와 갈등했다. 경쟁 술탄 아스 살리흐 아이유브와 이스마일은 서로에 대항하기 위해 십자군과 동맹을 맺으려 했다.[87] 1244년, 시리아의 분리된 아이유브 왕조는 십자군과 동맹을 맺고 가자 근처 히르비야(Hirbiya)에서 아스 살리흐 아이유브와 호라즘 연합군과 대결하여 라 포르비 전투(Battle of La Forbie)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아스 살리흐 아이유브는 대승을 거두었고, 예루살렘 왕국은 사실상 붕괴되었다.[88]

1244년에서 1245년 사이, 아스-살리흐 아이유브는 오늘날의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해당하는 지역을 안-나시르 다우드로부터 빼앗았다. 그는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다마스쿠스로 진격하여 1245년 10월에 비교적 쉽게 함락시켰다.[88] 그 직후, 사이프 알-딘 알리는 아스-살리흐 아이유브에게 노출된 아줄룬 공국과 요새를 항복했다. 호므스의 아이유브 왕조 ''아미르'' 알-만수르 이브라힘에 의해 전자가 사실상 파괴되면서, 호라즘과 아스-살리흐 아이유브 간의 동맹 관계는 1246년 10월에 끝났다.[88] 호라즘의 패배로 아스-살리흐 아이유브는 남부 시리아 정복을 완료할 수 있었다.[89] 그의 장군 파크르 앗-딘은 안-나시르 다우드의 영토를 정복했고, 카라크 하단을 약탈한 후 요새를 포위했다. 안-나시르 다우드나 파크르 앗-딘 모두 상대방의 군대를 몰아낼 만큼 강력하지 않아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결국 협상이 이루어져 안-나시르 다우드는 요새를 유지하되 나머지 공국은 아스-살리흐 아이유브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팔레스타인과 트란스요르단 지역의 상황을 정리한 파크르 앗-딘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이스마일이 여전히 점유하고 있던 마지막 장소인 보스라로 진격했다. 포위 공격 중에 파크르 앗-딘이 병에 걸렸지만, 그의 지휘관들은 도시를 계속 공격하여 1246년 12월에 함락시켰다.[90]

1247년 5월, 아스-살리흐 아이유브는 호므스 호수 남쪽 시리아의 주인이 되었고, 바냐스와 살카드를 장악했다. 안-나시르 유수프가 통치하는 알레포를 제외하고, 그의 다른 아이유브 왕조의 반대 세력이 진압되자, 아스-살리흐 아이유브는 십자군에 대해 제한적인 공세를 펼쳤다. 파크르 앗-딘을 갈릴리 지역으로 보내자 티베리아스는 6월 16일에 함락되었고, 곧 타보르 산과 카우카브 알-하와가 뒤따랐다. 템플 기사단 요새가 있는 사파드는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보였고, 아이유브 왕조는 남쪽으로 행군하여 아스칼론으로 향했다. 십자군 수비대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한 아스-살리흐 아이유브는 이집트 함대를 보내 포위 공격을 지원했고, 10월 24일 파크르 앗-딘의 군대는 성벽의 틈을 통해 돌입하여 수비대 전체를 살해하거나 사로잡았다. 이후 도시는 파괴되어 버려졌다.[90]

아스-살리흐 아이유브는 북부 시리아의 상황을 주시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돌아왔다. 호므스의 알-아쉬라프 무사는 아마도 그들의 후원-고객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전년 겨울에 중요한 요새인 살라미야를 아스-살리흐 아이유브에게 양도했다. 이는 알레포의 아이유브 왕조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들은 그것이 도시를 군사적으로 장악하는 기지로 사용될 것을 두려워했다. 안-나시르 유수프는 이를 용납할 수 없어 1248년 겨울에 호므스를 합병하기로 결정했다. 8월에 도시가 항복했고, 안-나시르 유수프의 조건으로 알-아쉬라프 무사는 호므스를 넘겨주었지만, 인근의 팔미라시리아 사막의 텔 바쉬르는 유지할 수 있었다. 아스-살리흐 아이유브는 파크르 앗-딘을 보내 호므스를 되찾게 했지만, 알레포는 도시 남쪽의 카프르 타브로 군대를 보내 대응했다.[91] 안-나시르 다우드는 안-나시르 유수프를 지원하기 위해 카라크를 떠나 알레포로 갔지만, 그가 없는 동안 그의 형제들 알-암자드 하산과 아즈-자히르 샤디는 그의 상속자 알-무아잠 이사를 구금했다. 이후 그들은 이집트의 알-만수라에 있는 아스-살리흐 아이유브의 진영으로 가서 카라크의 지배권을 이집트 내 영토와 교환할 것을 제안했고, 아스-살리흐 아이유브는 동의하여 내시 바드르 알-딘 사와비를 카라크의 총독으로 보냈다.[92]

1248년, 1,800척의 보트와 선박으로 이루어진 십자군 함대가 이집트를 정복하여 무슬림에 대한 제7차 십자군을 시작하려는 의도로 키프로스에 도착했다. 지휘관 루이 9세몽골인들에게 이집트에 대한 협공을 시작하도록 요청했지만, 실현되지 않자 십자군 군대는 다미에타로 항해했고 그곳의 현지인들은 상륙 즉시 도망쳤다. 당시 시리아에 있던 아스 살리 아유브는 이 소식을 듣고 다미에타를 피해 만수라에 도착하여 서둘러 이집트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군대를 조직하고 십자군을 괴롭히는 특공대를 양성했다.[94]

아스 살리 아유브는 병약했고 십자군의 공세로 인한 압박이 심화되면서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그의 아내 샤자르 알두르는 모든 전쟁 장군 회의를 소집했고 이집트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녀는 만수라의 요새화를 명령한 후 많은 양의 물자를 비축하고 그곳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또한 전쟁 갤리선을 조직하여 나일강을 따라 다양한 전략적 지점에 배치했다. 십자군의 만수라 점령 시도는 좌절되었고 루이 왕은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그는 나일강을 건너 만수라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그동안 아스 살리 아유브가 사망했지만, 샤자르 알두르와 바흐리 맘루크 장군들(예: 루크 알딘 바이바르스, 아이바크)은 공격에 맞서 십자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동시에 이집트군은 다미에타로부터 십자군의 보급선을 차단하여 증원군 도착을 막았다. 이 시점에서 아스 살리 아유브의 아들이자 새로 선포된 아이유브 술탄 알 무아잠 투란샤가 만수라에 도착하여 십자군에 대한 전투를 강화했다. 십자군은 결국 파리스쿠르 전투에서 항복했고 루이 왕과 그의 동료들은 체포되었다.[95]

알 무아잠 투란샤는 만수라에서의 승리 직후 맘루크를 소외시켰고 끊임없이 그들과 샤자르 알두르를 위협했다. 그들의 권력에 대한 두려움에, 바흐리 맘루크는 술탄에 반란을 일으켜 1250년 4월에 그를 살해했다.[71] 아이바크는 샤자르 알두르와 결혼했고 그 후 알 아슈라프 2세의 이름으로 이집트의 정부를 장악했으나, 알 아슈라프 2세는 명목상의 술탄일 뿐이었다.[96]

살라딘 직계 후손들의 아이유브 왕조 내 우위를 회복하려는 의도로,[97] 안나시르 유수프는 결국 맘루크가 지배하는 이집트에 맞서기 위해 시리아에 기반을 둔 모든 아이유브 ''아미르''들의 지원을 받는 데 성공했다. 1250년까지 그는 비교적 쉽게 다마스쿠스를 점령했고, 하마와 트란스요르단을 제외하고 안나시르 유수프의 직접적인 권위는 북 메소포타미아의 하부르 강에서 시나이 반도에 이르기까지 흔들림 없이 유지되었다. 1250년 12월, 그는 알무아잠 투란 샤의 죽음과 샤자르 알두르의 즉위 소식을 듣고 이집트를 공격했다. 안나시르 유수프의 군대는 알레포, 홈스, 하마의 병력과 살라딘의 유일한 생존 아들인 누스라트 아딘과 투란 샤 이븐 살라 아딘의 군대로 구성되어 이집트 군대보다 훨씬 크고 장비가 더 잘 갖춰져 있었다.[9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이바크의 군대에 의해 대패를 겪었다. 안나시르 유수프는 이후 시리아로 돌아갔고, 시리아는 그의 통제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97]

맘루크는 1252년 3월 십자군과 동맹을 맺고 안나시르 유수프에 대항하여 공동으로 원정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알무아잠 투란 샤의 살해 이후 석방된 루이 9세는 군대를 야파로 이끌었고, 아이바크는 군대를 가자로 보내려 했다. 동맹 소식을 들은 안나시르 유수프는 즉시 맘루크와 십자군 군대의 합류를 막기 위해 가자 바로 외곽에 있는 텔알아줄로 군대를 파견했다. 한편, 나머지 아이유브 군대는 요르단 계곡에 주둔했다. 그들 간의 전쟁이 십자군에게 큰 이익이 될 것임을 깨달은 아이바크와 안나시르 유수프는 나즘 아딘 알바디라이를 통해 아바스 왕조의 중재를 받아들였다. 1253년 4월, 맘루크가 나블루스를 제외한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전역을 통제하고 안나시르 유수프는 무슬림 시리아의 통치자로 인정받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아이유브 왕조는 이집트에서 공식적으로 종말을 맞이했다.[99] 맘루크와 아이유브 간의 갈등이 재발하자 알바디라이는 다시 조약을 주선하여 이번에는 안나시르 유수프에게 팔레스타인의 맘루크 영토와 시나이의 알아리쉬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안나시르 유수프는 아이유브를 책임자로 두는 대신 예루살렘을 쿠투크라는 맘루크에게 넘기고, 나블루스와 제닌은 바이바르스에게 주었다.[100]

맘루크와의 합의 이후 1년 이상 안나시르 유수프의 치세에 평화가 정착했지만, 1256년 12월 11일 그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에 두 명의 사절을 보내 칼리프 알무스타심으로부터 "술탄"으로서의 역할을 공식적으로 위임받기를 원했다. 이는 안나시르와 아이바크 사이의 경쟁과 관련이 있었는데, 이 칭호는 맘루크와의 향후 분쟁에서 유용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맘루크는 이전에 바그다드로 사절을 보내 안나시르 유수프가 그 칭호를 얻지 못하도록 했고, 알무스타심은 어려운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100]

1257년 초, 아이바크는 음모로 인해 살해당했고 그의 15세 아들 알만수르 알리가 뒤를 이었으며, 사이프 아딘 쿠투즈가 영향력 있는 지위를 차지했다. 알만수르 알리의 즉위 직후, 안나시르 유수프와 관련된 또 다른 음모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이 음모의 혐의자인 알만수르 알리의 재상 샤라프 아딘 알파이시는 이집트 당국에 의해 목 졸려 죽임을 당했다.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시리아의 바흐리 맘루크는 안나시르 유수프에게 이집트를 침공하여 개입할 것을 압박했지만, 그는 바흐리 왕조가 이집트를 차지할 경우 자신의 왕위를 찬탈할 것을 두려워하여 행동하지 않았다.

1257년 아이유브 왕조 영토. 밝은 빨간색 지역은 안나시르 유수프가 통치했으며, 어두운 빨간색 지역은 카라크의 알무기스 우마르가 명목상으로 통치했다.


안나시르 유수프와 바흐리 맘루크 사이의 관계는 전자가 이집트 침공을 거부한 후 악화되었다. 1257년 10월, 바이바르스와 그의 맘루크들은 다마스쿠스를 떠나거나 도시에서 추방되었고, 함께 예루살렘으로 이동했다. 총독 쿠투크가 안나시르 유수프에 대항하는 그들을 돕기를 거부하자, 바이바르스는 그를 폐위시키고 알 아크사 사원(Al-Aqsa Mosque)에서 카라크의 아미르 알무기스 우마르를 ''쿠트바''에서 선포했다. 수년에 걸쳐 알무기스 우마르는 맘루크와 아이유브 왕조의 권위로부터 보호를 받으려는 카이로와 다마스쿠스의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자신의 영토 내에서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했다.[101]

예루살렘을 점령한 직후, 바이바르스는 가자를 정복했고, 안나시르 유수프는 이에 대응하여 자신의 군대를 나블루스로 보냈다. 전투가 벌어졌고, 맘루크들은 결국 요르단강을 건너 발카 지역으로 도망쳤다. 거기서 그들은 조라(Zoara)를 거쳐 사해 남쪽 끝에 도착했고, 카라크에 복종을 표했다. 알무기스 우마르와 바이바르스의 새로운 관계는 그를 안나시르 유수프의 시리아로부터 독립시켰다. 자신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알무기스 우마르는 팔레스타인과 트란스요르단의 영토를 바흐리 맘루크에게 분배하기 시작했다.[101] 새로운 동맹국들은 소규모 군대를 소집하여 이집트로 향했다. 팔레스타인과 알아리쉬에서 초기에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집트 군대에 압도적으로 수적으로 열세임을 보고 철수했다. 그러나 알무기스 우마르와 바이바르스는 낙담하지 않고 1258년 초에 1,500명의 정규 기병대로 군대를 시나이로 파견했지만, 이집트의 맘루크에게 다시 패배했다.[102]

3. 정치



아이유브 시리아의 몽골 정복




알레포에서 주조된 아이유브 왕조의 동전으로 에미르 알-자히르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164년, 누르 알 딘은 십자군이 이집트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르쿠를 원정군 지휘관으로 파견했고, 시르쿠는 살라딘을 휘하 장교로 임명했다.[26] 이들은 이집트 재상 디르함을 몰아내고 샤와르를 복위시켰으나, 샤와르는 시르쿠에게 군대 철수를 명령했다. 시르쿠는 누르 알 딘의 뜻에 따라 남겠다고 거부했다.[27] 시르쿠와 살라딘은 십자군과 샤와르 군대의 연합군을 빌바이스, 기자 근처,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 격파했다.[28]

1169년 샤와르와 시르쿠가 사망한 후,[29] 살라딘은 파티마 칼리프 알-아디드에 의해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이븐 알-아사르에 따르면, 살라딘은 "더 약하거나 젊은" 사람이 없었고, "그를 따르거나 섬기는 에미르도 없었기" 때문이다.[30] 살라딘은 이전보다 더 독립적인 위치에 놓였고, 누르 알 딘은 투란-샤를 감독관으로 임명하여 불화를 일으키려 했다. 누르 알 딘은 살라딘의 아버지 아유브를 합류시켰으나, 아유브는 이집트에서 아바스 왕조의 종주권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누르 알 딘은 아이유브 가문에 경쟁을 일으키는 데 실패했지만, 시리아의 여러 지방 총독들은 살라딘을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31]

살라딘은 카이로에서 누비아 연대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도록 투란-샤에게 명령한 후 이집트 통제를 강화했다.[35] 1171년 알-아디드가 사망하자 살라딘은 권력 공백을 이용하여 국가를 장악하고, 이집트의 충성을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조로 전환했다.[26]

1244년, 아이유브 왕조는 몽골군의 공격 이후 몽골 제국의 명목상 주권 하에 있었다. 안나시르 유수프는 1250년 카라코룸에 사절단을 보냈으나, 몽케는 훌라구에게 영토 확장을 지시했다. 훌라구는 1258년 바그다드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는데, 아이유브 왕조는 군대 소집에 실패했다.[103] 같은 해 디야르 바크르를 몽골에게 잃었다.[104]

안나시르 유수프는 훌라구에게 항의했으나 거부당하고 카이로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 요청은 카이로의 맘루크 쿠데타와 일치했고, 쿠투즈가 권력을 잡았다. 아이유브군은 비르제에 집결하여 몽골군에 대항했다. 1260년 알레포가 함락되고, 알레포 대모스크와 알레포 시타델이 파괴되었으며, 주민들은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106] 알 아슈라프 무사는 몽골과 동맹을 맺었고, 하마는 항복했다.[105] 안나시르 유수프는 다마스쿠스를 탈출했다.[106]

훌라구는 키트부카를 남겨 정복을 계속하게 했다. 다마스쿠스는 항복했지만 약탈되지는 않았다. 안나시르 유수프는 다마스쿠스 시타델 수비대를 규합했으나, 몽골의 포격에 수비대는 항복했다.[106] 몽골은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나블루스 수비대를 살해한 후 가자로 진격했다. 안나시르 유수프는 몽골에 사로잡혔고, 바니야스 총독은 몽골과 동맹을 맺었다.[105] 1260년, 맘루크 군대는 엔 자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하고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106] 안나시르 유수프는 투옥되어 사망했다.[107]

알 아슈라프 무사는 맘루크와 함께 싸워 호므스 통치를 계속했고, 하마의 알 만수르도 맘루크와 함께 싸워 하마는 아이유브 왕조 후손들이 계속 통치했다.[107] 1262년 알 아슈라프 무사 사후, 바이바르스는 호므스를 병합했고, 알-무기트 우마르는 처형되었다.[107] 1299년 하마의 마지막 아이유브 통치자가 사망하고, 1310년 아부 알 피다에게 하마가 복원되었다. 1331년 아부 알 피다가 사망하고 아들 알 아프달 무함마드가 뒤를 이었지만, 1341년 하마는 맘루크 통치하에 놓였다.[108]

아나톨리아 남동부에서 아이유브 왕조는 히슨 카이파 공국을 통치했고, 1330년대까지 독립적으로 남아 있었다. 일 칸국 분열 후, 아르투크 왕조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109] 14세기 히슨 카이파 성을 재건했고, 16세기 초 오스만 제국에 의해 대체될 때까지 맘루크와 둘카디르 왕조의 봉신이었다.[110]

살라딘은 아이유브 제국을 가족 통치 개념으로 묶인 여러 공국들의 연합, 즉 집단 주권 개념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소규모 술탄"이 존재했으며, ''아스-술탄 알-무아잠''이 최고 통치자로 군림했다. 살라딘 사후 이 자리는 강한 자에게 열렸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 간 경쟁이 심화되었고, 통치자들은 서로를 상대로 십자군과 공모하기도 했다.[112] 시리아에서는 각 주요 도시가 독립적인 공국으로 통치되었지만, 이집트는 중앙 집권 통치 전통으로 카이로에서 직접 통제했다.[111] 서남아시아에서 바그다드가 문화적, 정치적 패권을 행사했고, 다마스쿠스의 ''카디''("대법관")는 아바스 왕조에 의해 임명되었다.[112]

정치 권력은 아이유브 가문에 집중되었지만, 혈연 관계만은 아니었다. 노예와 측근도 큰 권력을 얻었고, 어린 통치자들의 어머니들이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환관들은 ''에미르'', 총독, 군대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바하 앗딘 이븐 샤다드는 파티마 왕조를 폐위하고 카이로 성벽을 건설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알-아지즈 우스만 사후, 알-만수르의 섭정이 되어 이집트를 통치했다. 샴스 앗딘 사와브는 자지라의 아미드와 디야르 바크르를 받았다.[113]

아이유브 왕조는 교육받은 엘리트를 모집하는 세 가지 주요 수단을 가졌다. ''셰이크''는 아이유브 가문의 지원을 받았고, ''디완''에서 급여를 받거나, ''와크프'' 수입을 할당받았다.[114] 아이유브 왕조는 후원 관행을 통해 엘리트와 연결되었고, ''와크프'' 수입 할당은 봉토(''이끄타'') 할당과 유사했다.[115]

1187년 예루살렘 정복 이후, ''아미르 알-하지''(순례 지휘관) 직책이 만들어졌다.[117] 1170년대부터 1218년까지 정부 소재지는 다마스쿠스였고, 카이로는 경제적 기반이었다.[112] 살라딘은 1171년 카이로에서 술탄으로 선포되었을 때, 소 서부 궁전을 정부 소재지로 선택했다.[118] 알 아딜 1세가 카이로에서 왕위를 찬탈한 후, 다마스쿠스와 카이로 간 경쟁 시대가 시작되었다. 알 아딜과 알 카밀 아래에서 다마스쿠스는 자치 주로 남았지만, 아스 살리 아이유브 통치 기간 동안 카이로의 봉신으로 전락했다.[119] 아이유브는 측근들에게 중요한 직책을 수여했고, 샤자르 알 두르르는 이집트 국정을 관리했다.[120]

3. 1. 이크타 제도

살라딘은 아이유브 술탄국이 멸망할 때까지 시행된 '''이크타''' 제도를 확립했다. 아이유브 왕조의 '''이크타''' 제도는 셀주크 제도를 본떴지만, 더욱 중앙집권화되었다. 아이유브 봉토 소유자는 개인적인 필요를 위한 특별 봉토(''카싸'')와 군대 유지를 위한 '''이크타'''의 두 종류 봉토를 소유했다.[121] 이집트의 아이유브 봉건제는 시리아 및 알 자지라 등 술탄국의 다른 지역 봉건 제도와 달랐는데, 시리아의 아이유브 봉건 영주들은 이집트의 영주들보다 더 많은 권력과 독립성을 누렸다.[121] '''이크타'''는 주로 아이유브 왕조 구성원, 쿠르드족 또는 맘루크에 의해 소유되었다. 쿠르드족 봉토 소유자는 알-하카리야, 알-후마이디야, 알-미흐라니야, 알-자르자리야 등 4개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아스 살리 아유브 통치 기간 동안, 알-카이마리야가 아이유브 군사 과두정치 내에서 지배적인 쿠르드족 부족이 되었다.[122]

4. 사회

아이유브 왕조 시대에는 이슬람이 중동 지역의 지배적인 종교였지만, 아라비아 반도 밖에서 다수가 이슬람을 믿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급 문화와 도시 인구는 아랍어를 사용했지만, 이슬람 이전 시대부터 사용되던 다른 언어들도 여전히 사용되었다.[123] 아이유브 왕조가 권력을 잡았을 때, 대부분의 이집트인들은 이미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었다.[124]

아이유브 왕조의 모국어는 쿠르드어였다. 살라딘은 아랍어와 쿠르드어를 모두 구사했으며, 아마도 튀르키예어도 구사했을 것으로 보인다.[2][3] 아이유브 왕조와 다른 쿠르드인들 사이에는 강한 민족 의식이 존재했다. 역사가 R. 스티븐 험프리스에 따르면, 살라딘은 이러한 쿠르드족의 민족 의식을 바탕으로 파티마 왕조의 재상직을 얻을 수 있었다.

아이유브 시대는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쿠르드족 통합의 절정을 보여주는 시기였다. 아이유브 왕조는 쿠르드족 왕조로서, 다양한 부족과 사회적 지위의 쿠르드족이 군대와 종교 엘리트 등 왕국의 높은 지위를 차지하며 부족 통합의 촉매 역할을 했다. 아이유브 왕조는 술탄국과 쿠르드족 친족 간의 관계를 강화했고, 쿠르드족은 부족적 윤리, 연대, 그리고 고향과의 연결을 유지했다.

그러나 중세 이슬람 문화 전문가인 인류학자 야세르 타바에 따르면, 12세기 후반에 통치한 아이유브 통치자들은 쿠르드족 기원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셀주크 왕조의 전임자들과 맘루크 왕조의 후임자들과는 달리 확고하게 "아랍화"되었다.[131] 아랍 문화와 언어[127]는 그들의 쿠르드족 유산 대신 정체성의 주요 구성 요소가 되었다.[128] 아이유브족 사이에서는 아랍어 성이 훨씬 더 흔했는데, 이는 이들이 권력을 잡기 전에 이미 아랍어를 사용하는 세계에 부분적으로 동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유브족은 원래 고향인 이란 문화와의 연결을 계속 유지했다. 알-아딜 1세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알-무아잠 이사와 함께 쿠르드어와 심지어 페르시아어를 구사했다는 증거가 있다. 알-무아잠 이사는 샤나메를 아랍어로 번역하도록 명령했고, 이 번역은 1224년에 파트 이븐 알리 알-분다리에 의해 완료되었다. 누르 앗-딘 샤한샤, 바람샤, 파루크 샤, 투란-샤와 같은 이름에서 일부 이란적 낭만주의가 감지될 수 있다. 대부분의 아이유브 통치자들은 유창한 아랍어를 구사했으며, 아즈-자히르 가지, 알-무아잠 이사와 같은 일부는 아랍 시를 썼다.[129]

아이유브 왕조는 군대와 관료의 고위직에 쿠르드족, 튀르크족, 코카서스 출신 사람들을 주로 고용했다. 아이유브 군대의 보병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기병대는 주로 아이유브 아미르와 술탄이 군사 노예 또는 ''맘루크''로 구매한 자유민 출신 쿠르드족과 튀르크족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수는 8,500명에서 12,000명 사이로 변동했다. 아이유브 왕조 초기에는 투르크멘족의 대규모 병력이 있었고, 아랍 보조 병력, 과거 파티마 군대(예: 누비아인)와 별도의 아랍 분견대(특히 바누 키나나 부족)도 존재했는데, 이들은 주로 이집트 방어에 헌신했다. 쿠르드족과 튀르크족 부대 사이의 경쟁은 지도적 지위가 위태로울 때 종종 발생했으며, 아이유브 왕조 말기에는 튀르크족이 군대에서 쿠르드족보다 더 많았다. 쿠르드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술탄은 두 집단에 대해 공정성을 유지했다.[140] 파티마 왕조와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아이유브 통치자들은 상당한 수의 '맘루크'(군사 노예)를 유지했다. 13세기 전반에 '맘루크'는 대부분 킵차크족과 체르케스인 출신이었으며, 이들이 킵차크 튀르크어를 계속 사용했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132][133]

4. 1. 인구 구성

아이유브 왕조 시대의 정확한 인구 수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콜린 맥에비디와 리처드 존스는 12세기 시리아의 인구를 약 270만 명, 팔레스타인과 트란스요르단은 50만 명, 이집트는 500만 명 미만으로 추정했다.[141] 조시아 C. 러셀은 같은 시대 시리아의 8,300개 마을에 240만 명이 거주했으며, 10개 도시에 23만~30만 명이 살았다고 추산했다. 그중 8개 도시는 아이유브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러셀이 추정한 당시 시리아의 주요 도시와 인구는 다음과 같다.

에데사다마스쿠스알레포예루살렘
인구24,00015,00014,00010,000



러셀은 이집트의 마을 인구를 2,300개 마을에 330만 명으로 추산했는데, 이는 당시 농촌 인구 밀도로는 높은 수준이었다. 그는 이를 이집트 토지의 높은 생산성으로 인한 농업 성장의 증가 덕분이라고 보았다. 도시 인구는 훨씬 적어 233,100명으로, 전체 이집트 인구의 5.7%를 차지했다. 이집트의 도시들은 다른 지역보다 더 높은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 인구 밀도가 높았다.[142]

러셀이 추정한 당시 이집트의 주요 도시와 인구는 다음과 같다.

카이로알렉산드리아쿠스다미에타파이윰빌베이스
인구60,00030,00025,00018,00013,00010,000


4. 2. 종교 정책

아이유브 왕조는 이슬람 자료에서 '쿠르드족 왕조'(dawlat al-akrād)라고 불렸다.[126] 중세 아랍 역사가들은 아이유브 왕조를 '쿠르드족의 국가' 등으로 지칭했다.ملوک الأکراد ,دولة الأکراد,الدولة الأيوبية الکردية|translit=Dawlat al-Akrād, Al-Dawlat Al-Ayyūbīya Al-Kurdīya, Mūlūk Al-Akrādar

1169년 살라딘은 파티마 칼리프 알-아디드에 의해 재상으로 임명되었다.[30] 살라딘은 이집트에서 아바스 왕조의 종주권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31] 1171년에 알-아디드가 사망하자, 살라딘은 이 권력 공백을 이용하여 사실상 국가를 장악했다. 권력을 잡은 후, 그는 이집트의 충성을 바그다드에 기반을 둔 수니파 이슬람을 따르는 아바스 칼리파조로 전환했다.[26]

살라딘은 가족 구성원에게 국가의 고위직을 부여하기 시작했으며, 시아파 무슬림이 지배하던 카이로에서 말리키 법학 학파의 칼리지와, 그가 속한 샤피이 학파의 칼리지를 알-푸스타트에 건설하도록 명령함으로써 수니파 무슬림의 영향력을 확대했다.[35]

1214년에 아즈-자히르 가지가 건설한 알레포 성채 대사원의 첨탑


12세기에는 이슬람이 중동에서 지배적인 종교였다. 아이유브 왕조가 권력을 잡았을 때 대부분의 이집트인들은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었다.[124]

쿠르드어는 아이유브 왕조의 모국어였다. 술탄 살라딘은 아랍어와 쿠르드어를 모두 구사했으며, 아마도 튀르키예어도 구사했을 것이다.[2][3] 아이유브 왕조는 쿠르드족 왕조로서 부족의 촉매 역할을 했다. 다양한 부족과 사회적 지위의 쿠르드족이 군사에서 종교 엘리트까지 아이유브 왕국의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아이유브 왕조는 술탄국과 그들의 쿠르드족 친족 간의 관계를 강화했고, 쿠르드족은 그들의 부족적 윤리, 연대, 그리고 그들의 고향과의 연결을 유지했다.

아랍 문화와 언어[127]는 그들의 쿠르드족 유산 대신 그들의 정체성의 주요 구성 요소가 되었다.[128] 알-아딜 1세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알-무아잠 이사와 함께 쿠르드어와 심지어 페르시아어를 구사했다는 증거가 있다. 알-무아잠 이사가 샤나메를 아랍어로 번역하도록 명령했고, 번역은 1224년에 파트 이븐 알리 알-분다리에 의해 완료되었다. 누르 앗-딘 샤한샤, 바람샤, 파루크 샤, 투란-샤와 같은 이름에서 일부 이란적 낭만주의가 감지될 수 있다.

콥트교도 복음서, 다미에타, 이집트, 아이유브 시대, 1179-80


이집트에는 대규모의 콥트 기독교인 공동체가 있었다.[137] 토착 콥트어는 이 시점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지만 문학 및 전례 언어로 계속 사용되었다.[135][134]

파티마 왕조 시대에 이집트의 비무슬림들은 일반적으로 번영했지만, 칼리프 알-하킴 비-암르 알라의 통치 기간은 예외였다. 그러나 시르쿠흐가 재상직에 오르면서 비무슬림 인구에 대한 여러 법령이 제정되었다. 오구즈 튀르크와 쿠르드족으로 구성된 시리아 원정대가 이집트로 오면서 종교에 관계없이 소수 민족에 대한 여러 차례의 학대가 발생했다.[137] 이러한 사건은 시르쿠흐와 살라딘이 파티마 칼리프의 재상으로 있을 때 발생했다.[137]

살라딘이 이집트의 술탄으로 통치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조언가인 카디 알-파딜의 권유로 기독교인들은 재정 행정에서 고용되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다양한 아이유브 아미르들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계속 허용했다. 알코올 소비, 종교 행렬, 교회 종의 타종을 금지하는 등 여러 규정이 부과되었다. 아이유브 왕조 초기에 고위 기독교인들과 그들의 가족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136] 역사가 야코브 레브에 따르면, 비무슬림에 대한 박해는 그들에게 어느 정도 영구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은 지역적이고 제한적이었다.[137] 지중해 무역을 관리하기 위해 아이유브 왕조는 유럽인, 주로 이탈리아인, 프랑스인, 카탈루냐인알렉산드리아에 대규모로 정착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제5차 십자군 이후 이 지역의 상인 3,000명이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114]

12세기 시리아 인구의 대다수는 수니파 무슬림으로, 일반적으로 아랍인 또는 쿠르드족 출신이었다. 시리아 북부, 팔레스타인, 트란스요르단 및 상부 메소포타미아에는 대규모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다. 그들은 아람어를 사용했으며 이 지역 토착민이었으며, 대부분 시리아 정교회에 속했다.[139]

예멘과 하드라무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이드파 형태의 시아 이슬람교를 따랐다. 상부 메소포타미아의 주민들은 수니파 무슬림 쿠르드족과 튀르크족으로 구성되었지만, 그 지역에는 상당한 야지디 소수 민족도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슬람 세계 전역에 퍼져 있었고, 대부분의 아이유브 도시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 예멘과 시리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유대인들도 시골 마을에 살았다. 1197–1202년 예멘의 아이유브 아미르인 알-말리크 무이즈 이스마일은 아덴의 유대인들을 강제로 개종시키려 했지만, 이 과정은 1202년 그의 죽음 이후 중단되었다. 유대인 공동체 내, 특히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는 카라이파 유대교의 소수가 존재했다.[123]

5. 경제

아이유브 왕조 시대에는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다양한 정책이 시행되었으며, 농지 관개를 위해 운하가 건설되었다.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을 이용한 농업이 경제의 기반을 이루었고[293], , 면화, 사탕수수 재배가 성행했다.[161] 특히 사탕수수 재배는 하 이집트에서 상 이집트로 확대되었고, 설탕 상인과 술탄, 아미르에 의한 제당 공장 경영이 성행하여 설탕은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294] 파이윰 지방은 국가 수입의 주요 재원이었으며, 살라딘 치세에는 이집트 내 모든 이크타 수입의 약 8%가 파이윰 지방에서 나왔다고 여겨진다.[295]

아이유브 시대 이집트에서 제조된 도자기


십자군과의 전쟁은 아이유브 왕조와 유럽 국가 간의 경제 관계 발전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두 문화의 접촉은 농업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296] 살라딘 사후 권력을 잡은 알 아딜은 기독교 세력과의 공존 및 통상 관계 구축을 시도했다.[297] 1202년 알 카밀과 베네치아의 협상으로 베네치아 선박의 알렉산드리아다미에타나일강 삼각주 항구 도시로의 입항이 허가되었고, 베네치아는 이집트 원정을 시도하는 유럽 세력에 대해 어떠한 원조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298] 아이유브 왕조 영토 내에는 베네치아인 거주 구역과 영사관 개설이 인정되었다.[235]

이라크 방면의 혼란으로 인해 동서 무역에서는 홍해를 거치는 해로가 주요 경로가 되었고,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는 무역 거점으로 번영했다.[161] 홍해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보안선 배비, 중계 기지 건설이 시행되었고, 홍해를 지나는 상인들은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299] 예멘의 아덴에서 홍해, 나일강을 거쳐 카이로, 알렉산드리아에 이르는 루트에서는 카리미 상인들이 활약했고, 그들은 향신료, 견직물, 도자기 등의 상거래에 종사했다.[300] 아이유브 왕조는 십자군 세력과 홍해 무역 독점권을 놓고 다투었고, 1183년 아이자브 앞바다에서 이집트 함대가 십자군 함대를 격파한 후 카리미 상인들이 홍해 무역을 독점했다.[300] 카리미 상인은 인도양 무역도 반쯤 독점하는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그들에게 징수한 세금으로 국고가 윤택해졌다.[301]

국제 무역의 발전에 따라 채권과 은행 제도의 기본적인 원칙도 발달했다. 유대인, 이탈리아인 은행가는 시리아에 대리점을 설치했고, 상거래에는 환어음이 사용되었으며, 시리아 각지의 은행에서는 예금 제도가 이용되었다. 알 카밀 치세에는 국가 재정이 엄격하게 통제되었고, 그의 사후 국가 예산 1년분에 상당하는 저축이 남겨졌다고 한다.[302] 13세기 이탈리아에서는 레반트 무역(동방 무역)에 종사한 이탈리아 상인에 의해 이슬람 국가에서 지급 어음 개념이 도입되었다.[303] '수표'를 의미하는 아랍어 사크(ṣaqq)가 영어의 수표(cheque)의 어원이 되었다고 생각된다.[303]

안정적인 농업 활동과 카리미 상인들의 활약에 따라 카이로는 바그다드를 대신하는 대도시로 발전했다.[304]

6. 문화

아이유브 왕조 시대에는 의학, 약학, 식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적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살라딘다마스쿠스의 누리 병원을 본떠 카이로에 두 개의 병원을 세워 환자 치료와 의학 교육을 제공했다.[147]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에서는 마이모니데스, 이븐 자미, 압드 알-라티프 알바그다디, 알다크와르, 라시둔 알수리, 이븐 알바이터 등 많은 과학자와 의사들이 활동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아이유브 왕가의 개인 의사로 일했다.[147]

아이유브 왕조 시대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군사 건축이며, 특히 시아파가 지배했던 이집트에 수니파 ''마드라사''(신학교)를 건설하여 수니파 이슬람 부흥을 꾀했다는 점이다. 살라딘은 카이로와 알-푸스타트를 하나의 성벽 안에 포함시키는 급진적인 변화를 시도했다.[148] 성벽 구축 기술은 십자군에게서 배운 자연 지형을 따르는 겹겹의 성벽, 파티마 왕조에게서 물려받은 총안구와 원형 탑, 그리고 아이유브 왕조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동심원 계획 등이 활용되었다.[149]

알-아즈하르 공원 건설 중 발견된 카이로의 아이유브 왕조 성벽 (2006년 1월)


3D 레이저 스캔 데이터 이미지. 12세기 아이유브 왕조 시대의 바브 알-바르키야 문은 알-아즈하르 공원과 접해 있다. 이 요새화된 문은 전형적인 도시 성벽 문보다 더 큰 보안과 통제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둘러싸는 연동된 구조로 건설되었다. (아가 칸 재단/CyArk 연구 파트너십의 이미지)


아이유브 왕가, 지방 총독 가문, 울라마 ("종교 학자") 가문 등 무슬림 여성들은 아이유브 왕조 건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마스쿠스에서는 여성들이 15개의 ''마드라사'', 6개의 수피 병원, 26개의 종교 및 자선 기관을 건설하며 종교 건축에 대한 지속적인 후원을 보였다. 알레포에서 가장 인상적인 아이유브 왕조 건물로 알려진 피르다우스 마드라사는 섭정 여왕 데파 카툰이 후원했다.[150]

1176년 살라딘의 명령에 따라 카이로 시타델 건설이 시작되었다. 알-마크리시에 따르면, 살라딘은 무카탐 언덕의 공기가 맑다는 이유로 이곳을 선택했지만, 실제로는 방어적 필요성과 시리아의 기존 요새와 시타델을 참고한 결과였다. 시타델 북부 지역의 성벽과 탑은 주로 살라딘과 알 카밀의 작품이다.[148] 알-카밀은 시타델을 완성하고 기존 탑을 강화 및 확장했으며, 자급자족형 요새 역할을 하는 여러 개의 사각 탑을 추가했다. 알-카밀의 가장 인상적인 구조는 북쪽 울타리의 벽을 가로지르는 일련의 거대한 직사각형 요새였다.[151] 알-카밀의 요새는 엠보싱 처리된 녹슨 석조로, 살라딘의 탑은 매끄러운 다듬은 돌로 구별된다. 이 무거운 소박한 스타일은 다마스쿠스 시타델, 보스라 시타델 등 다른 아이유브 왕조 요새에서도 나타난다.[146]

알레포는 아이유브 왕조 시대, 특히 아즈-자히르 가지 통치 기간 동안 시타델, 급수 시설, 요새, 성벽 외부 개발 등 건축 분야에서 큰 변화를 겪었다. 아즈-자히르 가지는 누르 앗딘의 발룸을 제거하고 북부 및 북서부 성벽을 재건하면서 도시 울타리를 완전히 재건했다. 그는 성벽 구간의 탑 건설을 왕자와 군 장교들에게 분할했고, 각 탑에는 특정 왕자의 이름이 새겨졌다. 또한 도시 외곽의 쇠퇴한 요새를 포함시키기 위해 동쪽 성벽을 남쪽과 동쪽으로 확장했다.[152] 바브 킨나스린은 1256년 안 나시르 유수프에 의해 완전히 재건되었으며, 오늘날 중세 시리아 군사 건축의 걸작으로 꼽힌다.[153] 아이유브 왕조 건축은 알레포에 시타델 재건, 급수 네트워크 확장, 거리와 구역에 분수와 목욕탕 제공, 수십 개의 신사, 모스크, ''마드라사'', 영묘 건설 등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다.[154]

살라딘 정복 이후 예루살렘은 주택, 시장, 공공 목욕탕, 순례자 숙소 건설에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성전 산에서는 바위 돔 내부 벽과 기둥을 대리석으로 덮고 돔 드럼의 모자이크를 개조했으며, 알 아크사 모스크의 ''미흐라브''를 수리하고 1217년 알 무아잠 이사가 모스크 북쪽 현관에 세 개의 문을 만드는 등 수많은 작업이 수행되었다.[156] 승천 돔이 건설되고 성전 산의 기존 독립형 돔에 대한 복원 작업도 이루어졌다.[157]

6. 1. 교육

아이유브 왕조의 통치자들은 학문과 교육에 대한 관대한 후원을 펼쳤다. 이들은 수니파 이슬람 지식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제국 전역에 다양한 마드라사 형태의 학교를 세웠다.[144] 이븐 주바이르에 따르면, 살라딘 시대의 다마스쿠스에는 30개의 학교, 100개의 목욕탕, 그리고 많은 수의 수피 데르비시 수도원이 있었다고 한다. 살라딘은 또한 알레포, 예루살렘, 카이로, 알렉산드리아헤자즈의 여러 도시에 여러 학교를 지었다. 그의 후계자들 역시 많은 학교를 세웠으며, 그들의 아내, 딸, 사령관, 귀족들도 수많은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자금을 지원했다.[144]

아이유브 왕조는 샤피이 종파 출신이었지만, 수니파 종교-법학 사상의 네 가지 모든 체계에 대한 교육을 제공하는 학교를 세웠다. 아이유브 왕조가 통치하기 전에는 시리아에 한발리 및 말리키 종파를 위한 학교가 없었지만, 아이유브 왕조는 이들을 위해 별도의 학교를 설립했다. 13세기 중반, 이븐 샤다드는 다마스쿠스에 40개의 샤피이 학교, 34개의 하나피 학교, 10개의 한발리 학교, 3개의 말리키 학교가 있다고 기록했다.[145]

살라딘이 이집트에서 수니파 정통주의를 회복했을 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카이로에 10개의 "마드라사"가 설립되었고, 아이유브 왕조 통치 기간 전체에 걸쳐 25개가 추가로 설립되었다. 특히 알-푸스타트에 위치한 각 학교는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중요성을 지녔다. 대부분의 학교는 샤피이 종파에 헌신했지만, 다른 학교는 말리키 및 하나피 마드하브에 속했다. 알-샤피이 이맘의 무덤 근처에 세워진 "마드라사"는 중요한 순례 중심지 인근에 위치해 수니파 신앙의 주요 초점이 되었다.[146]

고위 정부 관리들이 이집트, 예루살렘, 다마스쿠스에 약 26개의 학교를 세웠고, 당시 드물게 평민들도 이집트에 2개의 의료 기관을 포함해 약 18개의 학교를 세웠다.[145] 대부분의 학교는 기숙사 형태로, 교사와 학생 모두가 원칙적으로 거주했다. 임명된 교사들은 법학자, 신학자, 전통주의자들이었고, 그들은 가르치는 기관에 대한 기부금으로 봉급을 받았다. 각 학생에게는 그가 의존할 숙소, 그가 요구하는 모든 기술을 가르칠 교사, 그리고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정기적인 보조금이 제공되었다. "마드라사"는 사회에서 권위 있는 기관으로 여겨졌다. 아이유브 왕조 시대에는 "마드라사"에서 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정부에서 직업을 얻는 것이 불가능했다.[145]

아이유브 왕조 시대에는 수니파 보호 정책에 따라 이집트와 시리아에 많은 마드라사(신학교)가 건설되었다.[162] 국가에서 세운 마드라사는 교육 외에도 수니파 지식을 보급하는 역할도 했다. 16세기까지 다마스쿠스에 세워진 마드라사 중 약 절반이 아이유브 왕조 시대에 건설된 것이다.[305] 12세기 말 여행가 이븐 주바이르는 살라딘 시대의 다마스쿠스에 20개의 마드라사와 수많은 수피 도장이 세워졌다고 기록했고, 마드라사 건축 사업은 살라딘 이후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에게 계승되었다. 술탄뿐만 아니라 술탄의 아내, 딸, 유력한 군인, 귀족도 마드라사 건설과 자금 지원에 참여했다.[302]

아이유브 왕조에서는 샤피이 학파가 주요 지위를 차지했지만, 샤피이 학파 외의 수니파 4대 법학파 마드라사도 건설되었다. 아이유브 왕조 성립 전 시리아에는 한발 학파와 말리크 학파의 마드라사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아이유브 왕조 시대에 시리아에 처음으로 이 두 학파를 위한 독립적인 마드라사가 설치되었다. 1170년 가을에 카이로에 샤피이 학파와 말리크 학파의 마드라사가 개설되었고, 이듬해 1171년에 살라딘의 조카 타키 앗딘 우마르에 의해 더 호화로운 마드라사가 건설되었다.[193] 살라딘을 섬긴 학자 이븐 샤다드에 따르면, 당시 다마스쿠스에는 40개의 샤피이 학파 마드라사, 34개의 하나피 학파 마드라사, 10개의 한발 학파 마드라사, 3개의 말리크 학파 마드라사가 존재했다.[306] 시아파의 최고 학부인 알 아즈하르 대학교의 존재는 경시되었고, 맘루크 왕조의 성립까지 아즈하르 대학교의 영향력은 잃었다.[307]

살라딘과 그의 후계자는 다른 이슬람 국가의 권력자와 달리 권세를 과시하기 위한 대규모 모스크 건설 사업을 하지 않고 마드라사 건설 사업에 열의를 쏟았다.[308] 이집트에 수니파를 부활시킨 살라딘은 이 땅에 10개의 마드라사를 건설했고, 그의 사후 이집트에는 25개의 마드라사가 더 세워졌지만, 그 마드라사의 위치는 푸스타트에 집중되었다. 이집트에 세워진 많은 마드라사는 샤피이 학파에 속했고, 나머지는 말리크 학파와 하나피 학파에 속했다. 이맘의 묘소 인접한 곳에 세워진 마드라사는 중요한 순례지가 되어 수니파 신봉자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309] 이집트, 예루살렘, 다마스쿠스에는 고관에 의해 26개의 마드라사가 세워졌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시민에 의해 18개의 마드라사가 이집트에 세워졌으며, 그 중에는 2개의 의료 기관이 포함되어 있었다.[306]

마드라사에는 원칙적으로 교사와 학생이 기숙하는 규정이 마련되어 있었고, 많은 마드라사는 주택으로서의 역할도 했다. 교사들은 법학, 신학, 전통적인 이슬람 제학을 가르쳤고, 그들의 급여는 마드라사의 와크프에서 충당되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숙소, 연구를 원하는 다양한 분야의 교수, 정기적인 장학금을 이용할 수 있었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대략 주어졌다. 아이유브 왕조 시대의 사회에서 마드라사는 권위 있는 기관으로 여겨졌고, 마드라사에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공직에 오를 수 없었다.[306] 그러나 아이유브 왕조 시대에 건설된 많은 마드라사는 교육과 거주에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지 않았다.[310] 많은 마드라사에는 건설자의 묘가 병설되어 있었고, 묘는 교사와 함께 와크프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인접한 교사에서 낭송되는 코란에 의해 매장된 죽은 자의 영혼의 안녕이 보장되는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311] 이 때문에 마드라사는 학문 기관 외에 영묘로서의 역할도 갖게 되었고, 후계 국가인 맘루크 왕조에서도 이 경향은 이어졌다.[312]

6. 2. 과학과 의학

아이유브 왕조는 통치 지역에서 다양한 지식 및 학문 분야, 특히 의학, 약학, 식물학 분야의 지적 활동 부활을 이끌었다. 살라딘은 다마스쿠스의 유명한 누리 병원을 본떠 카이로에 두 개의 병원을 건설하여 환자 치료와 의학 교육을 제공했다.[147] 이 시기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에는 마이모니데스, 이븐 자미, 압드 알-라티프 알바그다디, 알다크와르, 라시둔 알수리, 이븐 알바이터 등 많은 과학자와 의사들이 번성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아이유브 왕가의 개인 의사로 직접 섬기기도 했다.[147]

6. 3. 건축

아이유브 왕조 시대의 건축은 군사 건축에서 가장 두드러졌으며, 특히 이전 시아파가 지배했던 이집트에서 수니파 이슬람의 부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수니파 ''마드라사''를 건설하는 데 힘썼다. 살라딘이 이집트에서 시행한 가장 급진적인 변화는 카이로와 알-푸스타트를 하나의 성벽 안에 포함시킨 것이었다.[148] 성벽 구축 기술 중 일부는 자연 지형을 따르는 겹겹의 성벽과 같이 십자군으로부터 배웠다. 총안구와 원형 탑과 같은 많은 기술은 파티마 왕조로부터 물려받았으며, 다른 기술은 아이유브 왕조가 독자적으로 개발했는데, 특히 동심원 계획이 그러했다.[149]

무슬림 여성, 특히 아이유브 왕가 출신, 지방 총독의 가족, 그리고 ''울라마'' ("종교 학자")의 가족은 아이유브 왕조 건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다마스쿠스는 여성들의 종교 건축에 대한 지속적인 후원을 받았다. 그들은 15개의 ''마드라사'', 6개의 수피 병원, 그리고 26개의 종교 및 자선 기관을 건설했다. 알레포에서 시리아에서 가장 인상적인 아이유브 왕조 건물로 알려진 피르다우스 마드라사는 섭정 여왕 데파 카툰이 후원했다.[150]

1176년 9월, 살라딘의 명령에 따라 카이로 시타델 건설이 시작되었다. 알-마크리시에 따르면, 살라딘은 그곳의 공기가 도시의 다른 곳보다 더 신선했기 때문에 시타델을 건설하기 위해 무카탐 언덕을 선택했지만, 그 건설은 건강한 분위기보다는 방어적 필요성과 시리아의 기존 요새와 시타델의 예를 따른 것이었다. 시타델 북부 지역의 성벽과 탑은 살라딘과 알-카밀의 작품이 대부분이다.[148] 알-카밀은 시타델을 완성했으며, 기존 탑 중 일부를 강화하고 확장했으며, 자급자족형 요새 역할을 하는 여러 개의 사각 탑을 추가했다. 리처드 요먼스에 따르면, 알-카밀의 가장 인상적인 구조는 북쪽 울타리의 벽을 가로지르는 일련의 거대한 직사각형 요새였다.[151] 알-카밀의 모든 요새는 엠보싱 처리된 녹슨 석조로 식별할 수 있으며, 살라딘의 탑은 매끄러운 다듬은 돌을 가지고 있다. 이 더 무거운 소박한 스타일은 다른 아이유브 왕조 요새에서 흔한 특징이 되었으며, 다마스쿠스 시타델과 시리아의 보스라 시타델에서도 볼 수 있다.[146]

알레포는 아이유브 왕조 시대, 특히 아즈-자히르 가지 통치 기간 동안 큰 변화를 겪었다. 아이유브 왕조의 건축적 업적은 시타델, 급수 시설, 요새, 그리고 성벽 외부 개발에 집중되었다. 아즈-자히르 가지가 누르 앗-딘의 발룸을 제거하고 북부 및 북서부 성벽을 재건하면서 도시 울타리의 완전한 재건이 시작되었다. 그는 이 성벽 구간의 탑 건설을 자신의 왕자와 군 장교들에게 분할했으며, 각 탑은 그 이름을 새긴 특정 왕자와 관련되었다. 이후 아즈-자히르 가지는 동쪽 성벽을 남쪽과 동쪽으로 확장하여 도시 외곽의 쇠퇴한 요새를 알레포의 울타리에 포함시키려 했다.[152] 바브 킨나스린은 1256년에 안-나시르 유수프에 의해 완전히 재건되었다. 이 문은 오늘날 중세 시리아 군사 건축의 걸작으로 남아 있다.[153] 종합적으로 아이유브 왕조 건축은 알레포에 지속적인 인상을 남겼다. 시타델이 재건되었고, 급수 네트워크가 확장되었으며, 거리와 구역에는 분수와 목욕탕이 제공되었다. 또한 수십 개의 신사, 모스크, ''마드라사'', 그리고 영묘가 도시 전역에 건설되었다.[154]

살라딘의 정복 이후 예루살렘의 아이유브 왕조 시대는 주택, 시장, 공공 목욕탕, 순례자 숙소 건설에 대한 막대한 투자가 특징이었다. 성전 산에서 수많은 작업이 수행되었다.[155] 살라딘은 바위 돔의 모든 내부 벽과 기둥을 대리석으로 덮도록 명령했고 돔의 드럼에 있는 모자이크 개조를 시작했다. 알-아크사 모스크의 ''미흐라브''가 수리되었고 1217년에 알-무아잠 이사는 모스크 북쪽 현관에 세 개의 문을 만들었다.[156] 승천 돔 또한 건설되었고, 성전 산의 기존 독립형 돔에 대한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157]

7. 아이유브 왕조의 군주



아이유브 왕조의 군주 목록은 다음과 같다.



1169년 살라딘이 삼촌 시르쿠와 함께 장기 왕조를 위해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아이유브 왕조가 시작되었다.[26] 아이유브란 이름은 살라딘의 아버지인 나짐 앗딘 아이유브의 이름에서 기원한다. 살라딘은 삼촌 시르쿠가 죽은 후 재빨리 이집트를 장악하고 1169년 다미에타를 침공한 십자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27][28][29] 1171년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알아디드가 죽자 파티마조를 폐위시켰다.[35] 1174년 장기조의 자신의 주군 누르 앗 딘이 죽은 후에는 시리아다마스쿠스를 복속하여 이슬람의 최대 강자가 되었다.

살라딘은 카이로에서 파티마 군대의 5만 명 규모의 누비아 연대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후 이집트에서 통제를 강화했다.[35] 권력을 잡은 후, 그는 이집트의 충성을 바그다드에 기반을 둔 수니파 이슬람을 따르는 아바스 칼리파조로 전환했다.[26]

1193년 살라흐 앗딘이 죽자 아이유브조는 살라흐 앗 딘의 후계자들에 의해 각각 상속되었는데 이후 분열되고 그 힘이 점차 약해졌다. 살라흐 앗 딘의 형제인 알아딜과 그의 아들 알카밀 시대에는 아이유브조는 힘이 약해 잠시 예루살렘을 십자군에게 내주기도 하였다. 알카밀의 아들 살리흐가 죽은 이후 아이유브조는 완전히 힘을 잃고 노예 출신의 맘루크 왕조로 대체된다. 알무잠 투란 샤는 실질적인 맘루크 왕조의 시작으로 본다.

8. 다마스쿠스의 아이유브 군주

통치 기간군주
1174년-1193년살라흐 앗 딘
1193년-1196년알아프달
1196년-1218년알아딜
1218년-1227년알무아잠
1227년-1229년안 나시르 아우드
1229년-1237년알아슈라프
1237년-1238년앗살리흐 이스마일
1238년알카밀
1238년-1239년알아딜 2세
1239년앗 살리흐 나짐 앗 딘
1239년-1245년앗살리흐 이스마일 (두 번째 통치)
1245년-1249년앗 살리흐 나짐 앗 딘 (두 번째 통치)
1249년-1250년알무잠 투란 샤
1250년-1260년안 나시르 유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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